가장 좋은 길을 가야하지 않습니까?


가장 좋은 길을 가야하지 않습니까?(창 20:1-7)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 땅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1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데스라는 말은 ‘카도쉬’(거룩)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거룩한’ 이라는 뜻이다. 술은 히브리어로 ‘수르’인데, ‘벽’이라는 뜻이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술’은 동쪽 삼각주 지역에 있는 이집트 요새의 벽을 뜻하기도 했다. 아시아인들이 이집트로 침략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지리적으로는 가데스와 이집트의 국경선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적인 위치보다 영적인 의미를 따져보면, 아브라함은 ‘거룩한 길’과 ‘이방인의 길’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방인의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 그랄 왕에게 자기 아내를 갖다 바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과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겠나?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야 할 것인가?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가장 좋은 길을 가야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어떻게 가장 좋은 길을 찾아갈 수 있겠나?


1. 진리를 꿰뚫어보는 영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믿는 것이다. 사실을 바라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실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누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자기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그의 집안을 심판하신 것이다.


아비멜렉이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에게 어째서 자기를 속였느냐고 추궁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사라가 누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교묘한 사실 뒤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 사실이 곧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말한 것은 육적인 안목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진리를 감춘 것이다. 사실 진리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어갈 언약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그 땅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언약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여겼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에 대해서 무기력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육적인 안목에 붙잡혀서 실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에서 육적인 안목을 뛰어넘어야 한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만 바라보면 언약을 성취하기 어렵다. 가나안 12명의 정탐꾼을 기억해 보라.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육적인 안목으로 사실을 보았던 사람들은 약속을 이루지 못했다. 반면에 언약의 관점, 영적인 안목으로 진리를 꿰뚫어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을 성취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2. 좋은 것을 취하고, 좋은 것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 무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다닌 것이 25년 가까이 되는 시점이다. 영적인 삶을 그 정도 살았으면 도가 터야 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 우리보다 훨씬 다이나믹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브라함인데, 그 조차도 생존의 문제 앞에서 영적인 관점을 유지하지 못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아내를 누이라고 해도 이해할만 했다. 그러나 25년이나 하나님을 따랐으면, 이제는 언약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소개해도 당당하게 언약의 사람으로 소개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좋은 것을 주었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좋은 영향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아비멜렉의 집을 망하게 하는 것을 주었다. 좋은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것을 주었다. 신앙생활이 오래 되었는데, 여전히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신앙생활이 오래 될수록 영적인 삶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와 계신가? 우리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자리까지 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을 취하고,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은혜 받은 상태에서 나쁜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주려고 하면 안 된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좋은 것을 취하고, 좋은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3.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도하는 자리로 이끌고 가신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하나님께서 성도를 은혜의 자리로 이끄시는 방법은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고 영적인 삶을 살면서, 기도하는 자리로 찾아들어갈 때가 있다. 삶이 곤고해지면 기도하는 자리로 찾아들어간다.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무작정 좋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연단하신다. 그렇게 연단되고 난 이후에, 우리 삶의 환경을 아름답게 조성해 주시는 것이다. 출애굽 백성을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다. 그 곳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인들로 세워가셨다. 그렇게 영적인 단련을 통과했을 때,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어여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의 영성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시고, 특별하게 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상태를 기뻐하시는 것일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더 찾듯이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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