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에 흔들려야 한다.(삿 21:25)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 사사로 사용하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갈렙의 사위였던 옷니엘 이후에, 에훗이라는 사사가 나옵니다. 에훗의 특징이 “왼손잡이”였습니다. 그런데 ‘잇테르 야드 예미노’는 ‘오른손이 제한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삿 4장에는 사사 드보라가 나옵니다. 드보라는 여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사사 드보라는 가장 충격적인 인물입니다. 여성이 사사로 세워져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기 때문입니다. 삿 6장에는 기드온이 나옵니다. 기드온은 겁쟁이에 비전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라고 하면서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사사 입다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삿 11:1절에서 입다는 “큰 용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길르앗의 본처 아들들이 입다를 쫓아냅니다.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쫓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돕’이라는 땅에 가서는 “잡류”들과 어울립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나쉼 레킴’인데, ‘텅 빈 자들, 방탕한 자들’(삿 9:4)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사기에서 굵직한 스토리를 보여주는 사사들의 면면이 어떻습니까? 에훗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보라는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기드온은 겁쟁이였고,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 잡류와 어울렸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까? 역사를 주관하고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붙잡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흔들리면 사명에서 멀어진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믿음이 조금씩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싸움을 회피하기 시작하고, 가나안 족속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단 지파가 우상 숭배를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바알과 섞어서 혼합 종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단 지파에게로 우상을 들여온 제사장이 “요나단”입니다. 그가 누구의 후손입니까? 삿 18:30절에서, 그가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말씀에 흔들려야 하는데, 감정에 흔들려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에 흔들려야 한다”입니다. 성도가 그래야 합니다. 자기 감정, 자아가 쏟아내는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면 사명이 안 됩니다. 성도가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 말씀에 흔들려야 합니다. 말씀에 인생이 흔들려서 사명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씀에 붙잡혀서 사명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감정에 흔들려서 타락하고 복수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을 보면서,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 정도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들이 타락할 정도였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늘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타락합니까? 사사기가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신앙하지만, 말씀보다 자기 생각대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이며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자기의 소견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까?

사사기에 분명한 이유가 나옵니다. 말씀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중심으로 살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12지파 안으로 레위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48개의 성읍을 레위인에게 주어서, 12지파에 들어가 살게 했습니다. 레위인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이제,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이스라엘이 말씀 중심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칠칠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에는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와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평소에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절기가 되면 한 곳에 모여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레위인 중심, 제사 중심”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말씀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타락한 것입니까? 말씀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들이 돈을 좇아서 삯군처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극복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니까 “각자 자기 하고 싶은대로, 끌리는대로, 소견대로 행하였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타락이 다른 게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이 해체된 것이 타락입니다. 세속적인 것이 세속적인 무슨 외형적으로 화장을 짙게 하고 옷을 야하게 입는다고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선택을 자꾸 하니까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중심에 말씀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삶은 언제나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고백이 앞서게 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앞세우는 것을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앞세워지려면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모세가 7년마다 말씀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신 31:10절 이하를 보면, 매 7년째 되는 안식년 초막절에 모든 백성에게 말씀을 읽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300년동안 한 번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체험했던 어른들이 죽으면서, 말씀을 모르는 후손으로 남게 됩니다. 삿 2:10절을 보면,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세대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의 영웅들이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 후에 일어난 세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 광야의 역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들을 모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사기에서 우리가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모르고 사니까 “말씀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씀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이 되지 못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가나안 족속들과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가나안의 우상과 문화가 죄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두려워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말씀 중심일 때는 가나안의 철기 문화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 멀어지니까 가나안의 철기문화가 두렵게 보입니다. 수 17장에서, 요셉 자손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땅을 더 요구합니다. 다른 지파들과 땅이 섞였다고, 자기들은 두 개의 지파니까 분깃을 하나 더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의 힘과 철 병거를 보면서 포기해 버립니다. 말씀과 멀어지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게 되고, 사명을 포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메마르고 거친 땅만 보면서 살았는데, 가나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이방 족속들의 화려한 농경문화가 보입니다. 만나만 먹고 살았는데, 풍부한 먹거리들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화려하고 좋은 문명을 없애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지 못한 이유와 똑같습니다. 보기에 너무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아예 없애 버리는 것보다 적당히 타협해서 자기들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여호와 신앙을 바알 신앙과 혼합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씀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지 않으니까 세상과 싸워 이겨야 되는 것을 모르고 타협했습니다. 세상에 넘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이끌려서 따라온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살아온 것입니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말씀을 모르는 채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없이 사는 인생은 잘못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없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 생명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있는데, 지금 당장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면서, 그게 영혼에 들어오면 인생의 마스터키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어떤 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도 3-4년이 거린다면, 그 시간 동안에 농사를 잘 지으면 열매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