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을 겨냥할 때 삶의 자리가 바뀌게 된다.(창 31:43-49)
17세기의 위대한 설교가인 리차드 벡스터가 [회심]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일 당신 안에 거룩을 향한 처절한 싸움이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가짜이다.”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을 닮으려고 하는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닮으려고 하는 거룩한 열망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거룩이라는 주제와 씨름할 것이다. 말씀이 여러분에게 도전이 되실 것인데,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1. 내 안에서 속이는 것의 실체를 발견해야 한다.
사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는 내 안에 있는 죄가 나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창 29장을 보면, 야곱이 속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야곱이 속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속이는 인간 야곱이 창 29장으로 와서는 속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역설을 보게 된다. 야곱이 사기당하는 모습을 보면, 자기가 속였던 방식으로 똑같이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야곱이 인생을 살면서 속았다고 항변을 할지 모른다. “하나님 어찌 나를 속이십니까? 어찌 세상이 나를 속인단 말입니까?” 그런데 야곱은 인생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항변할 지도 모르지만, 실은 자기 안에 있던 속임수가 자기에게 되돌아 온 것이다. 야곱 안에 있었던 죄의 속성, 속이는 속성이 라반과 레아를 통해서 야곱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지 않았다면, 야곱의 인생도 라반과 레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인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세상이 자기를 속인 것이 아니라 야곱 안에 있었던 죄가 야곱을 속인 것이다.
그러니까 삶이 여러분을 속이는 것 같다면 먼저 자신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닌가? 내가 나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신앙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을 먼저 물어야 한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데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한탄해 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님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있는데 세상이 나를 속인다고 한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에게 진실하면 속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진실하다면, 고난과 환난이 있을지는 몰라도 속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진실한데도 고난과 핍박이 온다면, 그 고통과 환난을 이겨낼 신앙의 힘과 용기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2. 삶이 거룩이라는 목적지를 겨냥해야 한다.
본문에서 라반과 야곱이 돌무더기를 쌓은 뒤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47절과 48절을 보면,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라고 했다. ‘여갈사하두다’라는 말은 아람어이고, ‘갈르엣’이란 말은 히브리어인데, 둘 다 ‘증인의 무더기,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이 증거의 무더기란 무엇을 증거하는 것인가? 이 증거의 무더기란 라반과 야곱이 서로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기로 약속한 증거이다.
지금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가? 라반과 야곱이 완전히 분리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생애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다운 삶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라반과 야곱을 분리시키신 것이다. 야곱은 라반과 분리되어서 구별됨, 즉 거룩의 삶으로 나가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원하시는 삶의 패턴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거룩이다.
그러면 거룩이란 무엇인가? ‘거룩’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되다, 분리되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카도쉬’는 ‘그냥 구별되다, 분리되다’란 뜻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다운 상태로 구별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창조의 목적인 존재의 상태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거룩’이다.
여기에 예배 종이 있다. 이 종은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타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종이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세 번 종을 친다. 이유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종을 치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의 자리로 모셔 들인다. 그런데 예전에 교회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막 떠들면’ 종을 ‘땡땡땡’ 치고는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회의를 하다가 사람들이 소란스러우면 종을 ‘땡땡땡’ 치고는 했다. 그럴 때 종이 거룩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종이 만들어진 존재의 목적답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항상 종을 세 번 친다. 그 때 그 종은 거룩한 것이 된다. 종이 만들어진 목적, 그 존재의 존재다움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시나? 그렇다면 인간이 언제 거룩해지는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대로 존재하는 상태가 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나? 웨스트 민스터 신앙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고백이,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A.W. 토저는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은 예배를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된 이유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거룩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예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이 있다고 모두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목적으로 존재할 때 거룩한 것이다. 우리는 죄라든지 죄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 이성이 추구하려는 탐욕과 분리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거룩한 상태로 존재하기를 원하신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갈등하는 것은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대로 존재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이해하고, 격려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거룩이라고 하고, 하나님은 성도가 그런 거룩에 도달하기를 원하신다.
3. 거룩을 겨냥할 때 저주가 축복의 자리로 바뀐다.
이제 야곱이 라반과 ‘여갈사하두다, 갈르엣’이라 부른 ‘무더기’를 경계로 라반과 분리되었다. 야곱은 라반과 분리되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55절에 중요한 표현이 나온다.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라반이 그들을 “축복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라반은 야곱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이었다. 야곱의 재산이 늘어났을 때는 시기와 질투심으로 야곱을 대했다. 야곱이 도주했을 때는 그를 죽일듯이 쫓아왔다. 한 마디로 야곱은 라반과의 관계에서 저주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거룩”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니까 저주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거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다가 잘 못 될까봐 걱정한다. 출세하지 못할까 보아서, 성공하지 못할까 보아서, 인정받지 못할까 보아서 염려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기독교는 능력이다”는 말을 했다. 기독교는 유익을 주는 종교이며, 일으켜 세우며, 자유하게 하고, 치유한다.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삶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철학이나 조언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거룩의 자리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역사하신다. 여러분 삶의 자리가 저주받은 자리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축복의 자리로 바꾸신다. 생명과 은혜의 자리로 바꾸신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도란 이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를 얻어내야 한다. 여러분이 그렇게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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