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내시는 신호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에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당시 최첨단의 문명, 눈에 보이는 화려한 도시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사흘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가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싸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신호”를 보내시기도 하고, 여러 환경과 사람들을 통해서도 “싸인”을 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를 통해서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출 4:27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산(즉, 시내산)에서 모세와 아론이 만납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을 다 말합니다. 그 다음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았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지크네’는 지파의 대표나 어른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을 모아서 어떻게 했습니까? 출 4:30절을 보면,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행한 것이 아니라 아론이 행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었습니다. 아론이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그들 앞에서 “이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출 4:31절에서,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을 통해서, 믿고 경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게 하는 동기가 말씀과 이적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도로 이끄는 것이 말씀과 이적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믿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 4:30절을 보십시요.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보고 믿게 될 때가 있습니다. 모세가 전한 말을 아론이 다시 전했습니다. 사람을 타고 넘어가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말씀, 이적, 그리고 고난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권능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말씀 말고도 “이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타내는 기적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분명한 한계를 초월하게 하시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 기적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 즉 지파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록원들”입니다. 출 5:14절과 15절을 보면, 이 기록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즉,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주목해서 보십시요. 벽돌의 수량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감독관들이 기록원들, 즉 히브리 사람들을 때렸습니다. 그들이 바로 왕에게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뜻을 꺽지 않습니다. 출 5:18절입니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이제, 히브리 사람 기록원들은 화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으로 바로를 떠나서 나오다가 모세와 아론이 길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와 아론을 보고 따져 말합니다. 출 5:21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말씀과 이적으로 “싸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섭리를 보고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고난은 절망의 신호가 아니라, 힘내라는 신호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난이나 시련, 질병이나 고통은 절망하고 낙심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힘내라는 소리입니다. 힘을 내서,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만나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기록원들이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지파의 어른들을 통해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적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로가 완악하게 명령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반대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에 붙잡히거나 거기에 취해서 그럽니다. 고난 중에도 더욱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세상의 권력과 성공과 출세에 취해서, 세속적인 논리를 자꾸 이입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저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는데, 자꾸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존중받으려고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도 세상 사람들처럼 ‘이성적이어야 한다,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벽돌을 더 만들어라, 벽돌을 더 만들어야 한다. 벽돌이 없으면, 우리는 화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벽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레베나’는 성경에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창 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 “하늘까지 닿아 보자”고 하며 탑을 쌓는 재료가 “벽돌”(즉, 레베나)입니다. 여기서는 ‘교만’을 상징합니다.
사 65장을 보면,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 때 나오는 말씀이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 65:3)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분향하지 않고 자기의 편의와 생각대로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벽돌이 의미하는 바는 교만이나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쌓아올리는 도구를 의미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으라.
세상은 하나님 없이, 자기의 탑을 쌓아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마귀에게 봉사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싸인을 읽어내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싸인을 잘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믿음의 반석이 굳건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J.D. 그리어는 [지저스 컨티뉴드]라는 책에서, “복음은 우리의 힘과 잠재력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력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는데는 고난만큼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자기를 포기하게 하십니다. J.D. 그리어는 “비어있는 영혼만이 좋은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혼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성도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성도를 연약하게 만드시는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초청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연약함을 느끼는 순간에 주님이 당신께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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