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가 된다.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아는 상태에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바로 이 말씀을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다.
1. “의에 주리고 목자른 자”란 어떤 사람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주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페이논테스’인데, 심각하게 굶주린 상태를 의미한다. 19세기 아일랜드 성공회 목사였던 존 다아비는 “주린다”는 것이 ‘주려 죽을 지경’의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눅 15장에 탕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 탕자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주려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바로 그런 상태가 ‘페이논테스’이다.
“목마른”에 해당하는 ‘딥손테스’도 심각한 상태의 갈증이다. 시 42편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했다. 그와 같은 갈증의 상태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그만큼 하나님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만큼 무엇을 원할까? 죄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니까 “의”란 죄의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다.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아와 온갖 형태의 자아의 무서운 표현에서 해방되고자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가지는 최고의 욕망이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기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범죄할 때가 있다. 시기와 미움과 갈등에 빠질 때가 있다. 다툼과 분열에 빠질 때가 있다. 신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영적인 삶에 대한 고민보다 생존의 문제에 집착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가? 주님의 말씀에 주목해 보자.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나? 그렇지 않다.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죄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죄의 문제란 예수님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마땅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결국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다. 구원의 문제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주님께 구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배부르게 된다고 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다.
2. 완전에 이르도록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
성도는 끊임없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는 ‘현재 분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계속적인 행동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문법적 표현이다. 성도는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있는 사람, 목말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자아가 보게 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데이비드 플렛은 “래디컬”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아가 왕좌에 앉아 통치하는 문화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가설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복음을 왜곡하고, 축소하며, 심지어 조작하는 위험천만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 자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복음을 왜곡하거나 조작하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결국 무엇을 구하는 사람일까?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기 원하는 상태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 말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완전에 이른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마음속에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할 때가 있었다고 했다. 육체의 연약함, 인간의 본성이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연약해서 이길 수 없는 죄를 성령의 법이 이기게 하신다. 그것을 롬 8장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육신의 생각, 자아의 고집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롬 8: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다. 롬 8: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주인되시면, 육신의 생각이 나와 원수가 되게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생각을 닮아가도록 이끌어 주신다.
자기의 자아를 따라가면 사망이 되겠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생명과 평안이다. 롬 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실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완전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하시라는 것이다.
3. 진짜 본질적인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배가 부른다”는 것은 ‘만족할 만큼 채워진다’는 뜻이다. 배고픔을 해소하거나 갈증을 해소하는 정도가 아니다. 차고 넘치도록 먹고 마시게 된다는 뜻이다.
요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사람들을 먹이셨다.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먹었냐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먹었다고 했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배부르게 먹었다.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그런 의미이다. 굶주림의 근원, 갈증의 근원을 완전히 해결받은 것이다.
여러분, 근원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만족이 이루어질 수 없다. 로이드 존스는 본래 의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설교하면서 “좋은 의사와 서툰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에게 질병이 생기면, 병원으로 간다. 누구도 고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 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그의 ‘고통’만을 해결해 주려고 하면 그는 “서툰 의사”라고 했다. 좋은 의사는 고통의 원인을 발견해서 치료해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말했다.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치료법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지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이 어떤 질병을 해결받지 못한다면, 가지고 있는 고통은 더 이상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다. 질병을 고치지는 않고 진통제만 사용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더 강력한 진통제를 사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 몸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여러분, 인간의 진짜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이 행복을 찾으면서도 불행과 함께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죄의 문제이다. 이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아의 문제이다. 구원받았어도 자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이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아의 문제가 해결을 받아야 한다. 말씀으로 완전히 해결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과 연합되기를 사모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방법이다. 여러분, 반석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불고 바닷물이 넘치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아무리 화려하게 지었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작고 초라한 집이라고 무너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시라. 사람들이 병원에서 병을 고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면 의사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실패하거나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질병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자기를 고치지 못하는 의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정말 왜 그러시는지 모르시는가? 관계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시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특징이다. 그런 사람들은 충분한 은혜를 맛보게 된다. 완전히 채워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여러분에게 이 은혜가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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