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 토저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붙들어라. 당신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신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을 무시하면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신에게 해가 된다.” 이게 믿음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면, 그 밖의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 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후 4:8-9)고 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 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어떤 순간에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시 18:28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라고 했다. 토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작은 등불이 꺼졌다고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등불을 다시 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의 어둠이 사라질 것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에도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쪽 문을 여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절망하는 순간에도 소망을 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소망의 불씨를 남겨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대목을 보면, 베냐민 지파가 몰살 당하는 와중에도 600명의 용사를 남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도 남겨 놓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룻기를 보면, 나오미가 남편과 자식을 다 잃어버린 절망의 순간에 룻을 통해서 소망을 보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무엇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올해에 무엇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지난 몇 년 동안 잃어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돈을 잃어버리고, 어떤 분은 건강을 잃었습니까? 어떤 분은 좋았던 관계에 불화가 생기고, 어떤 분은 세상에서 지위를 잃어버렸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소중하게 아끼던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까? 무엇을 잃어버렸든지, 잃어버린 것에 붙잡혀서 살면 신앙도 흔들립니다. 성도는 잃어버렸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소망의 씨앗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 것 인지를 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인간의 결국이 절망이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롬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범주에 여러분을 비추어 보십시요. 첫째 범주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둘째 범주는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으면 죄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셋째 범주는 마음으로 범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워하지 말라, 탐심을 가지지 말라,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넷째 범주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고 했습니다. 이런 죄의 범주에 여러분을 조명해 보십시요. 그러면 여러분, 하루에 몇 번 정도나 죄를 짓는 것 같습니까?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하루에 3-4번 이상은 범죄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에 1,000번이나 범죄한 영혼이 됩니다. 20년을 그렇게 산다면, 20,000번이 넘는 죄를 짓는 셈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는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범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망”인 것입니다. 왜 입니까? 사망이 죄를 과녁으로 쏘아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5:58절에서, “사망이 쏘는 것 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 죄를 과녁으로 삼아서 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당장 눈앞에 죽음을 두고 있는 환자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누구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모든 인생이 절망입니다. 롬 3:19절에서, 하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한 영혼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일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누가 들어오셨습니까? 롬 3:21절을 보십시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 호주 출신의 신학자 “레온 모리스”는 이 말씀이 “로마서에서 지금까지 쓰인 문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는 ‘뉘니 데’로 시작하는데, 우리 말로 번역할 때는 ‘데’를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데’라는 말은 ‘그러나’라는 뜻의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뉘니 데’라고 하면, ‘그러나 이제는’(But now)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라는 반전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절망이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다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고 표현했는데, 본래는 ‘빚을 다 갚았다, 다 지불했다(완불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 고, 여러분의 죄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게 “대속”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죽어야 하는데, 어린 양을 이삭 대신에 제물이 되어 죽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범 죄해서 죽어야 하는데, 희생 제물이 대신에 죄를 전가받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죽어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람들 대신에 죄값을 치르고 죽으신 것 입니다. 그것이 대속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롬 3: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우리로서는 갚을 수가 없는 죄의 값을 다 갚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 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또 엄청난 말씀입니다. “화목제물”에 해당하 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캅포레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캅포레트’가 무엇입니까? “언 약궤의 덮개”를 ‘캅포레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상자를 만들어서, 거기에 “십계명 두 돌판”을 넣게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이스라 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말씀이 담긴 상자라고 해서 “언약궤”라고 불렀습니 다. 그 상자의 덮개를 ‘캅포레트’라고 했습니다. “언약궤 덮개”인 캅포레트 위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면, 언약궤 덮개 위로 하나님이 임하신다고 했습니 다. 거기서 하나님이 속죄의 말씀을 선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속죄의 말씀 이 선포되는 자리라는 뜻으로 ‘속죄소’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게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KJV 성경에 서는 “은혜의 말씀이 나가는 자리”라는 뜻으로 ‘mercy seat’(시은좌)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것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속죄의 말씀, 은혜의 말 씀”이 나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과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성막에서 만나주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신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25절에서,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 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의 피를 믿을 때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22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 다.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습 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그의 피를 믿으면”(즉,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피흘려 죽으셨다는 진 리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의로울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할 때, 절 망에서 소망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분을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요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영접하는 자”란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한 것으로부터 고백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아주 다양하고 무궁무진했습니다. “여호와 샬롬,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치데누크, 여호와 삼마, 여호와 닛시”와 같은 이름이 고 백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로도 고백되었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도 고백 되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 예수님의 이름도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그 분의 긍휼과 사역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구세주이며, 모든 질병과 귀신을 압도하는 치료자이며, 만 물의 머리가 되시는 주권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며,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실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이 모든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권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창조자가 되시며, 나의 통치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시며, 나를 심판하실 심판의 주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의 일부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전체를 믿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 아멘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모든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방향과 선택과 목적을 내가 정하고 있다면, 주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재물 과 소유를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면 여전히 주님의 이름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주님의 이름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 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모든 지성과 인격과 성품과 삶의 영역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그런 그리스도인,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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