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마 6:9-13)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 중에 기도인도자가 기도한 후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화답할 때, 사용된 접속어가 헬라어로 ‘호티’이다. 이 ‘호티’라는 헬라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왜냐하면’이란 뜻의 접속사이고 다른 하나는 감탄사이다.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대개’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왜냐하면’이란 뜻을 반영한 번역이다.
옥스포드 주석에 따르면 ‘대개(大蓋)’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고 했다. 이 경우에 ‘호티’는 접속사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오늘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보다 긴 문장으로 화답할 때, 그들은 한결같이 마음으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호티,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라를 오게 하시고, 뜻을 이루시고, 양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죄를 용서하시고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악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실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고백했다. 그것은 아버지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이유와 까닭을 고백하는 것 이상이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의 모든 것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최종적인 신앙고백이다.
당시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로마 제국이 강대했다. 세상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그것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가이사에게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한 것임을 고백했다. 그것이 초대교회 신자들이 박해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들이 생명을 걸었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1.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나라이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는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었다. 그러면서 복음은 로마의 지배자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나라가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으로 품고 살았다. 썩어 없어질 세속적인 나라에 가치를 두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에 가치를 두고 살았다. 그것이 초대교회 성도의 삶이었다. 성도란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라’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공간이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고 했다. 왕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는 나라, 왕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왕국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마 13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 비유를 한번 더 이야기하겠다. 마 13:24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천국이라는 것이 씨앗 하나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씨를 뿌리는 사람이 누구라고 하셨나? 이 사람이 곧 예수님이라고 하셨다. 마 13:37-38절,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그러니까 천국이란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말하려고 하는 천국이란 무엇이라고 했나? “천국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천국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천국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 예수님과 일체가 되고 연합이 된 것이 천국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서 영생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의 삶이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 진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가 들어와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주인으로 계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찬송가 438장 가사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늘 나라”, 헬라어로 말하면 ‘우리노이스 바실레이아’가 되는 것이다.
2. 권세란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답게 이루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가 헬라어로는 ‘뒤나미스’인데,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다. 뒤나미스는 ‘권세, 권능’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내적으로 충만해지는 능력을 말한다. 이 단어에 대해서 설명드린 적이 있는데, 이것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능력이 아니라고 했다. 예를 들면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뒤나미스’는 오히려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데,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이 충만해져서 흘러넘치는 것이다. 충만해지니까 흘러넘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뒤나미스이다.
그러니까 권세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답게 이루어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내 안에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주인이 되셔서, 예수님으로 흘러넘치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흘러넘치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을 받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3.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신앙에는 두 가지 신앙이 있다. 하나님이 하는 신앙이 있고, 내가 하는 신앙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하는 신앙은 하나님께 붙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신앙이다. 반면에 내가 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떨어져서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면 실패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기를 내어드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하신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아지시도록 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려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기를 내어드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할 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도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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