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나쁜 기억은 원망이 되고, 좋은 기억은 승리가 된다.(출 17:8-16)


뜻밖의 시련을 만난 이스라엘


출 17:8절을 보면,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고 했습니다. “르비딤”에서 물 문제가 해결되자, 바로 이어서 아말렉이 쳐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정말 뜻밖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자기들에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같은 능력으로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말렉이 이스라엘의 뒤를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말렉의 행위를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말렉 족속을 미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혈족임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고 비겁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입니다. 에서가 엘리바스를 낳고, 엘리바스가 아말렉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혈족인 아말렉이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신 25:17절을, 모세가 가나안 세대들에게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르비딤에서 있었던 첫 전투의 배경입니다. 아말렉 족속이 피곤한 상태의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는 것입니다.

나쁜 기억이 아니라, 좋은 기억을 하라.


여기에, 하나의 영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말렉과 같은 마귀 사탄은 여러분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강한 부분을 때리지 않습니다. 연약한 부분을 때립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을 치지 않고,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쳐서 불타게 합니다.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고, 미움과 원망을 건드려서 불타게 합니다. “좋은 기억, 승리의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자꾸 끄집어 내게 합니다. 나쁜 기억들, 부정적인 생각들을 터져 나오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제목처럼 “나쁜 기억”은 결국 “원망”을 낳습니다.

마귀는 신자로 하여금 자꾸 원망하게 하려고 합니다. 원망을 끄집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쁜 기억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난과 부정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말을 하는 성도가 되십시요. 좋은 말이란 덕을 세우는 말입니다. 문제를 만들어 내는 성도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성도가 되십시요. 갈등을 일으키는 성도가 아니라 화목을 이루는 성도가 되십시요. 재를 날리는 성도가 아니라, 재를 주워담고 치우는 성도가 되십시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마귀는 여러분의 연약한 부분에 치고 들어옵니다. 그 연약한 부분을 자기가 붙잡고 씨름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후 10:5)고 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의 생각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로 영적인 무기를 삼으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성도의 무기가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가 보여주려는 메시지도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싸워서 승리했다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중에 강력하게 임재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이미 이스라엘 진영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중에도, 그들에게 대적이 침범해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도 인생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권”입니다. 주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때로 신자들에게 크고 작은 문제와 만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권”에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주인이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이 하나님 되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출애굽 백성이 아말렉과 싸운 것이 이런 사건입니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주인되심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또다시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기억을 심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좋은 기억들을 심어주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역사가 일어난다는 기억을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좋은 기억들이 승리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이 오늘 싸움의 핵심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서 말합니다. 9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따로 할 일이 하겠다고 합니다. 9절을 계속 보십시요.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싸움이 내일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미 패배했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잊고 있었습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랬던 오늘은 이미 아말렉에게, 원수 마귀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일은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 17:9)고 했습니다. 패배한 오늘과 승리하게 될 내일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서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결, 패배의 자리가 승리되게 한다.


“하나님의 지팡이”란 본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사용하던 모세의 지팡이였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지팡이를 버리라고 해서 버렸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으라고 해서 잡았더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버리기 전에는 “모세의 지팡이”였는데, 버린 것을 다시 잡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돌려주셔서 붙잡았을 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성결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이 다시 돌려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이 만지셔서 돌려주시는 것이 성결입니다. 내 손에 그냥 들려 있을 때는 부정한 것인데, 주님께 드렸다가 다시 받으면 성결인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성결입니다. 모세의 손도 성결입니다. 호렙산에서 손을 품에 넣어라고 해서 넣었더니 “나병 걸린 손”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붙잡고 있던 손의 실체가 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품에 넣었다가 빼라고 해서 순종했더니, 나병에서 깨끗한 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지셔서 돌려주시니까 성결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말하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손”이 모두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다가 받은 성결로 “산꼭대기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닛차브’는 ‘(계속) 서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성결로 계속 서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의 군대도 성결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여호수아의 군대야~ 너희도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라! 그래서, 나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처럼, 너희 군대도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모세가 기도를 시작합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아말렉을 물리치는 군대입니다. 모세가 손을 내리면, 주인되심을 잊어버리는 군대입니다. 자기가 주권인 군대입니다. 그러니까 아말렉에게 지는 군대가 됩니다. 특히, “손을 내린다”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야니아흐’는 ‘쉬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기도를 쉴 때,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주권에 붙잡힌 군대가 됩니다. 반대로 기도를 쉴 때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싸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기도가 생명입니다. 기도가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아론과 훌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동안 모세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기억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 줍니다.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12절에서,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무나’는 ‘버티게 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끝까지 기도를 버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패배했던 “르비딤”의 자리가, 승리하는 “르비딤”의 자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승리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하게 아십시요. 기도입니다. 기도가 불꽃처럼 타오르면, 안 되던 교회가 되는 교회로 바뀝니다. 안 되던 가정이 되는 가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안 되던 사업이 되는 사업으로 바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면 그렇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기로 자기를 맡겨드리면 그렇게 됩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승리의 깃발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기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주권”이 좋은 기억입니다. 이게 끝까지 살아 있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승리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기도로 승부를 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성도, 교회,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