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연약함을 영적 에너지가 되게 하라


내 안의 연약함을 영적 에너지가 되게 하라(창 33:1-11)


본문은 야곱이 에서를 만나 화해를 이루는 장면이다. 사백 인을 거느린 에서가 야곱의 눈앞에 나타났다. 야곱은 에서를 대적할 만한 힘이 없다. 게다가 그는 육체적으로 보면, 환도뼈가 부러져 나갔다. 그에게는 연약한 여자와 어린 자녀들도 있다. 싸움을 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며 낙담하던 야곱의 이전 모습을 볼 수 없다. 오히려 야곱은 차분하고 진지하며 여유있는 모습을 보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야곱이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다. 야곱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대열을 정리하고 에서 앞으로 나아가서 형에게 일곱 번 절을 했다.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여기서 “굽히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하’는 허리를 살짝 굽혔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땅에 엎드렸다는 뜻의 단어이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혀서 절을 했다는 의미이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나간 야곱이다. 그런 야곱이 에서에게 절을 할 때의 모습이 어떠했겠나? 불편한 몸으로 일곱 번이나 절을 했으니, 그 모습이 상당히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에서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야곱이 일곱 번이나 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에서에게 무슨 감정이 일어났을까? 그것을 이어지는 4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야곱이 절을 마치고 에서에게 가까이 갔을 때, 에서가 달려와서 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20여 년 동안 원수 관계에 있던 에서와 야곱이 형제관계를 회복하고 있는 순간이다. 야곱은 마치 왕을 대하는 것과 같은 예의로 에서를 대하고 있고, 에서는 자상한 형님처럼 야곱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은 씨름을 통해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셨고, 복수심에 가득 찼던 에서의 마음도 바꾸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변화를 통해서, 몇 가지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1. 하나님은 연약함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강한 부분을 사용하시지 않고, 야곱의 연약한 부분을 사용하신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에 앞서서 가족들을 정렬시켰다. 이 대목에서 대부분은, 야곱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배려해서 대열을 정비했다고 말한다. 순서를 보면 종들과 자식들이 에서를 향해서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다. 그 다음이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이며, 마지막이 라헬과 그녀의 아들인 요셉이다. 일견 타당한 논리이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절반만 맞는 해석이다.


본문에서 그려지는 야곱은 연약해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 자신의 모든 능력을 포기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야곱을 큰 약점이 있는 사람, 연약한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다. 그는 밤새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면서 체력을 소모했고, 눈물을 흘리면서 심력을 소모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온전한 평화를 얻은 사람이었다.


그가 에서의 앞으로 나설 때, 가족을 둘러본다. 어떤 방식으로 세울까? 야곱은 가족들을 둘러보면서 보면서 자기의 자아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순서로 구분한 것이 아니다.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순서대로 자식들을 세운 것이다. 자식들을 보면서 큰 아이들을 앞에 세우고, 작은 아이들을 뒤에 세웠다. 물론 제일 맏이는 레아의 자녀인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등이었다. 하지만 레아에게는 두 여종의 자녀들 이후에 태어난 잇사갈과 스불론이 있었고, 어린 딸 디나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라헬의 아들 요셉은 가장 어린 아들이었다.


야곱은 이렇게 약하고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도록 하면서 자기가 맨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에서에게 일곱 번 절을 하고 나서 나아갔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일곱 번 절을 하는 것은 군신의 예를 취하는 행위였다. 야곱은 에서의 군주됨을 인정해서, 군주에게 예의와 존경을 표현하듯이 절을 했다. 형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죄하는 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밤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변화된 야곱의 모습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와서 절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에서가 달려와서 안고 운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4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야곱에게 달려왔다. 에서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전에 라반에게는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지만, 에서에게는 어떻게 역사하셨을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야곱이 나와서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에서는 확실하게 느끼는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에서는 사냥꾼이었다. 짐승들은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이 있다. 사냥꾼 에서가 야곱에게 와서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동생의 가족들이 대열을 정비해 서 있는데, 나이 어린 것들이 뒤쪽에 있다. 그 순간 에서는 야곱이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거기에 야곱이 나와 일곱 번 절을 한다. 군주의 예를 보이고 있으니, 더욱 자신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나와서 절을 하는 동생이 다리를 절고 있었다. 자신에게 장자권을 탈취해간 동생이 부자가 되어 돌아온 줄 알았는데, 그의 몸이 망가져 있었다. 여기에 말씀의 포인트가 있다.


야곱은 강한 사람으로 에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존재로 에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에서의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20년 만에 만난 동생이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자기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밤새 씨름하고 울었으니 얼굴도 반쪽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에서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함께 울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사용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연약함에 불을 지피신다. 성령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친히 도우신다. 성령님이 친히 중보자가 되셔서 성도의 고백과 기도를 이끌어 주신다. 성도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2. 성도는 연약함을 영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다. 연약함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노력과 이성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달아서 겸비하게 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출 6:5절에 보면, “신음소리를 듣고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구원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들으시고 반응하셨다. 행 7:34절에서는,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인, 연약함에 움직이시는 마음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고 문제가 생기자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하셨다. 그들은 약속의 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쫓겨나서 이스마엘이 울자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며 약속을 주신다. 연약한 자에게 또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려고 하셨다가도 인간의 연약함에 멈춰버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자기의 연약함 앞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여러분도 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으면서, 요청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약한 부르짖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의 연약함이 “영적인 에너지가 되도록,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하나님께 자기를 올려드리면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상처가 영광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의 약점에 하나님의 능력을 부으셔서 사용하실 때가 많다. 쓴 뿌리와 아픔 때문에 쓰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고 했다. 자랑도 주님께 있고, 영광도 주님께 있는 것이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면서,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했다. 고후 11:30절,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러면 왜 바울은 약함을 자랑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연약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드리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내어 맡기고, 은혜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상처도 쓴 뿌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하고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처나 쓴 뿌리를 하나님이 해결하시도록 내어 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이 만지셔서 상처가 영광이 되게 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야곱은 자기의 환도뼈가 부러져 나갔다. 야곱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상처이다. 에서의 경우에는 과거에 그보다 더 큰 상처가 있었다. 동생에게 사기를 당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겨 버렸다. 그것이 고통이었고, 형제에 대한 분노였고, 자기 마음의 상처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라. 에서의 얼굴이나 마음에는 분노가 있어야 하고 상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어 놓으셨나? 야곱은 에서에게서 분노와 상처를 발견하지 않았다. 창 33:10절,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자기를 대하는 기쁨을 보았다.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의 상처에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갔고, 분노와 저주의 사람 에서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인 것을 믿어야 한다. 자기의 약점과 상처를 주님께 내어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바꾸신다. 자기의 염려와 고통을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시는 분이다.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란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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