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가 “애통”이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다. 여기서 “애통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데오’는 아주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존 맥아더는 성경에서 ‘슬픔’을 표현한 9개의 헬라어를 분석했다. 그 결과 ‘펜데오’란 단어가 그 중에서 가장 강하고 슬픈 뜻의 단어라고 이야기했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나타내는 데에만 사용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 37장을 보면,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애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펜데오’를 사용했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선언이었다. 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인가? “그들이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분에게 이것은 충분히 설득이 되는 말씀인가? 정말 그렇게 되는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기 때문에 복이 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애통하는 사람이고 싶으신가? 아니면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으신가? 오늘 이 주제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야 한다.
1. “애통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눈물을 흘린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성공과 성취로 인해서 만족감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반면에 실패와 좌절로 애통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무엇이 여러분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서 발생되는 것이라면, 오늘 다루는 주제와 방향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내면과 관계되어 있는 애통이다. 가난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애통이다.
마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고, 모르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하신다. 이것을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인용한 이사야 6장 말씀의 핵심은 “마음이 완악해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완악하여져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퀸데’는 ‘두껍게 되어서, 살이 쪄서, 무감각하게 되어서’란 뜻이다. 마음이 살찌고 두껍게 되어서 무감각하게 된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한다고 했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사람의 전형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왕”이라고 했다. 마음이 무거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다. 마음이 가난한 상태가 되어야 복음이 들려지고,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 자기를 의지하는 것들이 부서져 나가기 때문에 말씀이 들려지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 안에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었구나. 내가 의지하던 것들도 헛된 것이로구나. 나는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었구나” 그렇게 된다. 구원과 관련해서, 자기의 완전한 무능력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처해진 사망의 상태를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애통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란, 존 스토트가 말한 것처럼 “회개의 슬픔”이다. 자기의 죄된 본성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이다. 자기의 교만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회개의 애통이다. 그런 애통을 토해내는 사람이 “위로”의 은혜를 받는다.
2. 주님 외에는 답이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애통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찾는 적극적인 믿음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의 죄를 보면서 슬퍼하고, 그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이란 내가 가진 죄의 문제를 누구에게도 해결해달라고 부탁할 수 없는 상태이다. 애통이란 내가 가진 인생의 문제를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믿고 의지할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상태이다. 하나님 밖에는 나를 구원하실 분이 없다. 하나님 밖에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애통은 구원을 포함함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이것이 애통이다. 그렇게 맡기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임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아시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경험하면서 지었다고 추정하는 시가 있다. 그것이 시편 71편이다. 대표적인 비탄시 중에 하나이다. 그 시편을 보면, 시인의 소원이 나온다. 그것은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라”(시 71:18)는 소원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시겠나? 하나님께 자기를 맡긴 성도를 버리시겠나? 그렇지 않다. 다윗은 시 71:20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고난을 보이시지만, 결국에는 회복하게 하신다. 바닥에서 이끌어 올려주신다.
이렇게 전적인 주님의 은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받는다.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가 어디까지 보이시나? 얼마만큼 체험되시나? 여러분과 주님 사이에 놓여 있는 자랑거리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내 힘으로 이룬 성취나 옳다고 인정받았던 의로움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주님 말고 의지하는 것들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아야 한다. 사망의 권세를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 죄의 유혹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붙잡고 매달리는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위로가 보이게 된다. 구원하시는 은혜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지시는 위로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3. 애통하는 자를 하나님 곁으로 부르신다.
애통의 눈물, 회개의 눈물은 신자의 삶을 완전히 바꾼다. 여러분도 그런 눈물을 흘리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쁘거나 슬퍼서 흘리는 단순한 감정의 눈물이 아니다. 후회하고 탄식하는 눈물도 아니다. 회개의 눈물은 자기의 존재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는 눈물이다. 다윗과 밧세바가 죽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흘렸던 죄에 대해서 통회하는 눈물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흘렸던 눈물이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며 회개했던 눈물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 맥스 루케이도는 “자신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교만과 죄로 세상을 살다가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밀 브루너는 “하나님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결코 돕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끝장나야 하는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 들어왔다. 그 복된 소식, 희망의 소식이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소식이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요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회개의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 사람들에게 임하는 축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통의 눈물, 회개의 눈물을 흘린 사람은 변화를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거듭남의 변화를 체험한다. 기쁨도 체험한다. 위로하시고 동행하시는 은혜의 기쁨을 체험한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게 안 되면 산상수훈의 말씀이 거치는 돌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존재의 변화를 체험하면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내 자아의 힘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위로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힘이 되시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여기서 위로라는 말이 ‘파라칼레오’이다. 이 말의 본래적인 뜻은 ‘자기 곁으로 부른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파레클레이토스’, 즉 ‘보혜사 (성령)’이란 단어가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들을 하나님 곁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곁으로 부르셔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책임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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