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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다.(출 18:13-26)


불화하는 연약한 본성의 사람들


오늘 읽은 말씀은 이드로가 모세에게 지도자들을 세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13절을 보십시요.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을 재판했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에서,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서로에게 시비가 있어서, 소송할 만한 사건이 생기면 모세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판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인간의 연약한 본성입니다. 웬만한 일은 자기들끼리 시비를 가려도 됩니다. 누가 양보하든지 해서 끝내면 됩니다. 그런데 모세에게까지 왔다는 것은 그렇게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들끼리 해결이 되지 않는 사건과 분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경제적 활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지금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덮어주고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끼리 해결보지 못하는 시비가 엄청나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광야 같은 곳에서도 불화와 다툼이 일어났습니까? 왜 사람들이 사는 모든 곳에서 불화와 갈등이 일어나고, 다툼과 시비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약 4: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모든 싸움과 다툼이 어디에서 온다는 것입니까?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정욕”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도돈’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정욕”입니다. 자아가 불러일으키는 정욕은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화평이 아니라 다툼과 싸움으로 가게 합니다. 분쟁과 시기가 일어나게 하고, 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합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정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끼리도 다투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날마다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항상 그렇게 역사합니다. 신자에게도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이기적인 욕심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재판의 목적, 말씀을 이루는 것


모세가 내리는 판결의 방향이 그런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재판의 결론을 내리는지 보십시요. 16절을 보면,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재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고 손해를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판단을 내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16절을 분명히 보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과 법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러분, 신앙공동체가 나가야 하는 방향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무엇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따라갈 때, 선교적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받는 그릇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늘 말씀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선택해야 할 순간을 만나게 되면,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를 말씀에 의지해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게 하십시요.

시편 72편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저저로 따라붙게 된다고 했습니다. 인생에 평강이 이루어지는데, 그 평강이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원수와 대적들이 무릎을 꿇게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물을 바치고 섬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에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세워지는 것이 재판의 목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20절에서,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 문장 안에는 히브리어 ‘바흐’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이 ‘바흐’라는 단어는 ‘~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20절은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그 율례와 법도 안에서 마땅히 갈 길과 힐 일을 그들에게 보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 길과 할 일”이 ‘율례와 법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살아갈 날에 대한 모든 해답이 말씀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모세를 돕는 지도자를 세울 때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의 기준


이 기준은 이드로가 제시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23절을 보면 그 증거가 나옵니다. 이드로는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기준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면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자기가 제시하는 기준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인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란 무엇입니까? 21절에 나옵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라고 했습니다. 이드로는 “능력 있는 사람들”로 지도자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21절에서, “능력 있는 사람”의 기준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에서 “능력 있는 사람”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첫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이르에 엘로힘)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이르에’는 ‘두려워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을 가진 ‘야레’의 진행형입니다. ‘야레’는 죄인으로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존경과 신뢰를 가지고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능력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실하며”(아느쉐 에메트)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에메트’는 하나님의 성품 중에 하나인데, ‘진리’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쓰면 ‘진실해서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는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 확실하다’라는 뜻의 ‘아만’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는 말도 ‘아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하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줄 만한 신실하고 충성스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소네에 바차)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이익”이란 정당한 방법과 노력으로 얻은 재산이 아니라, 강제로 빼앗거나 뇌물로 받은 재물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미워한다고 했는데, ‘소네에’라는 히브리어는 ‘증오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혐오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들은 정직과 성실의 표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기준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제시하는 “능력 있는 사람”의 기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신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도덕적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주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직분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직분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세우려고, 여러 사람들 중에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을 특별히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기준을 통과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나갈 때, 끝까지 쓰임받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존중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다 능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끝까지 쓰임받고, 어떤 사람은 쓰임받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말씀 제목처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가나안 정탐꾼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나옵니다. 민 13: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12명을 선발해서 정탐꾼으로 보냅니다. 민 13:3절을 보면,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로쉬’, 즉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는 기준으로 지도자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출발할 때, “처음 믿음, 처음 능력”은 다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을 정벌하자고 했습니다.

반면에, 10명의 정탐꾼은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들이 붙잡힌 것은 “현실적”이라는 함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어렵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패한 10명이 붙잡힌 함정이 “현실적”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민 13:31절에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거짓을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똑같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10명은 언약을 배반하고 실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왜 입니까? “능력”이 있었지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확실한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진 바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능력을 믿음으로 사용할 때, 능력이 믿음에 따라서 쓰임받을 때,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진짜 능력이 됩니다. 그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라서 쓰임받지 못하면, 아무리 탁월한 능력도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과 교회를 망하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말 잘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모든 능력과 권세”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능력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능력이 믿음으로 사용되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말 잘하는 것으로 상처를 줍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으로 성령을 훼방합니다. 주님이 주신 소유와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아섭니다.


그러나 반면에, 가진 능력이 초라하더라도 믿음으로 쓰면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쓰면, 주님이 더욱 풍성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성도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란 결국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흘러가게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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