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를 생각하는 신앙의 자세



마지막 때를 생각하는 신앙의 자세(창 23:7-20)

현상적이고 외적인 삶의 모습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누구 안에서, 누구와 함께 살아왔느냐 하는 것이다. 창 39장을 보면, 요셉의 외형적인 모습은 애굽 사람 보디발의 노예였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절)라고 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애굽 사람의 집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애굽사람의 집에 노예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실패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고향 땅으로 가서 아버지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애굽 사람의 노예로 살았다. 그러니까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살았다. 하나님 안에서 사니까 환난도 얽매임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꿈과 소망을 성취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 기도의 제목을 삼으려고 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시기 바란다.


1.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성도의 삶에서는 누구 안에서 사느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죽으면 두 갈래의 길을 간다. 하나는 천국 영생의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옥 영벌의 삶이다. 그런데 이 길이 어떻게 갈라지게 되나? “죄 가운데 죽는 사람”과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의 차이이다. 요 8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 가운데 죽는 사람”은 지옥에서 영벌의 삶을 산다. 반면에 계 14:13절에 보면,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 안에서 살았다”는 말씀과 같다. 주님 안에서 살다가 주님 안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 복이 있나? 천국 영생의 삶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라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여인으로서 그다지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남편에 의해서 다른 남자에게 팔려갔던 때가 두 번이나 있었다. 나이가 90세에 이를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여종이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여종에게 멸시당하는 일까지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그녀의 생애는 굽이굽이 오솔길 인생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사라는 그런 와중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았다. 남자들에게 팔려 갔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멸시당할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의 편이 되시는 것을 체험했다. 시편 118:6절에 이런 고백이 나온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하나님이 당신의 편이다.


사라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히 11: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고 했다. 사라 자신도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인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생애는 결국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 안에서 떠나간 삶이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어머니’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란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2.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자기의 본향으로 삼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땅의 소유자인 헷 족속에게 가서 매장지로 사겠으니 팔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냥 받으면 되는데, 아브라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가 원하는 땅이 막벨라 굴인데, 돈을 받고 팔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또 헷족속 중에 에브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11절,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이쯤 되면 아브라함이 원하는 땅을 얻은 것이다.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또 아니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계속 주장해서 은 사백 세겔을 지불하고 그 땅을 자기 소유로 삼았다. 왜 아브라함은 끝까지 돈을 지불해서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했을까? 20절에 해답이 있다,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아브라함이 은 사백 세겔을 지불하고 땅을 구입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소유지로 확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아브라함은 자기 본향을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온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자기의 고향으로 바꾸었다는 말이다.


어찌보면 이 세상의 끝에는 죽음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끝에는 죽음이 있지만, 그 죽음 너머에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그는 이미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아내 사라를 매장하는데, 죽음의 끝자락에서 부활신앙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는 본향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


그러면 어디를 본향으로 삼아야 하겠나?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 가나안 땅이 자기 본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도 본향에 묻혀야 하고, 자기도 그 땅에 매장되어야 한다. 자기 뿐만이 아니라 이어질 후손들까지도 그 땅을 매장지로, 다시 말하면 본향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얻으려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남겨주려고 하는 언약의 행동이었고, 믿음의 행동이었다.


3.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구해서 받아야 한다.


막벨라 굴을 사는데 지불한 금액이 은 400세겔인데, 이것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작은 돈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공짜로 받을 수 있는 땅이었으니까, 은 800세겔의 가치를 지불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본향을 세속에 두지 않았고 언약에 두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막벨라 굴을 받아내려고 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성도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려고 작정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시편 81:10-11절은 정확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입을 크게 열면 마음껏 먹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하면 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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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은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데,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은혜 안에서 신령한 열매를 누려야 마땅하다. 그래서 성도란 “기도가 습관이 되고, 기적이 상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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