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3절을 보면,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라고 했다. 그들은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서 엠마오라는 촌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할 일 많은 일터에서 한가한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왜 돌아가는가? 절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죽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패턴이 이와 비슷하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되돌아오고, 나아갔다고 돌아오고 하는 반복이다. 열심히 하다가 식어지고, 또 열심히 하다가 식어지고 하는 반복이다. 신앙이 뜨거울 때에는 열심히 한다. 그러다가 식어지면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다시 무엇인가 계기가 생기면 다시 나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식어지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나아간 만큼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나아간 만큼 돌아오니 결국 그 자리가 되고 만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그랬다. 그들이 주님을 따를 때는 인생에서 큰 성장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후퇴를 의미한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낙심하고 후퇴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주님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가?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1.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오게 하신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서 “가리어져서”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크라툰토’인데, ‘붙잡히다, 억제당하다‘라는 뜻이다. 그들의 눈이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에 붙잡혀 있었을까? ‘슬픔, 낙심, 배신감, 두려움, 원망하는 마음’과 같은 것에 붙잡혀 있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시선에서 “슬픈 빛”을 읽어 내셨다. 20절을 보면,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라고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제사장과 관리들은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표현이 “우리 대제사장들과”라는 식으로 나간다. “우리”라는 표현 속에는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고, 존경과 친밀감이 담겨 있다. 제자들이 그들의 지도자들, 즉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이 믿고 존경했던 지도자, 자기들이 사랑했던 지도자들에게 실망한 것이다. 왜 그랬나? 그 지도자들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 제자들은 예수님께도 실망했다.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자기들을 자유하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우리 말로는 “바랐노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으로 보면 “바라고 또 바랐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이기를 간절하게 기대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야이고,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셨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대와 바람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실망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그들의 감정이 상당히 복합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배신감, 원망하는 마음, 낙심하고 슬퍼하는 마음들로 뒤섞인 상태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에 붙잡혀 있으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한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말씀으로 불을 붙이셨다.
25-26절,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그리스도의 길이란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고난을 통과한 뒤에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 다음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셨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본래는 마음에 불이 붙었다는 뜻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지니까,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녹여버렸다. 말씀으로 뜨거워지니까 은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보이지 않던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인데, 눈이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마 6장 참조)고 하셨다. 눈이 나쁘다는 말이 헬라어로 ‘포네로스’라는 단어인데, ‘악한, 비난받을 만한, 불행한’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우리가 악하고 해로운 것, 비난받을 만한 것, 불행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도가 보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러면 시선이 불투명해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몸이 어두워진다고 했는데, 어둡게 된다는 말의 원어는 불투명해진다는 뜻도 있다. 초점이 어두워져서 불투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못된 곳을 보고, 잘못된 것을 선택하게 된다.
성도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좋은 것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것들만 자꾸 보인다. 자신을 보는 눈이 자존감이라면, 나쁜 눈으로 자기를 볼 때 자존감이 망가진다. 세상을 보는 눈이 세계관이라면, 나쁜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비관론자나 회의주의자로 빠지게 된다. 성도는 자기를 보든지 세상을 보든지 이웃을 보든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바울이 선언했듯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성도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힘으로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믿음의 위대한 선진들이 그렇게 살았다. 아브라함의 눈,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 다윗과 요셉의 눈이 어떠했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말씀을 보았다.
무엇을 보느냐가 삶의 방향을 다르게 하고, 신앙의 질을 다르게 한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성도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0-31절에서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라고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눈이 “밝아졌다”고 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노익데산’은 “열려졌다”는 뜻의 단어이다.
그들의 눈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열려졌다는 뜻이다. 이게 은혜이다. 주님은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스려 주시고, 닫혀 있던 눈을 열어 주신다. 그렇게 눈이 열려지니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진리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3. 흔들린 인생을 굳건하게 회복시켜 주신다.
그들이 주님과 만나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나? 33절,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고 했다. 그들이 돌아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처럼 “순교자의 길, 사도의 길”을 따라서 땅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만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눈이 열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눈이 떠졌다는 뜻이다.
그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인 줄 알았다. 죽음이 인생의 최종 승리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에 눈을 뜨고 보니 죽음이 별것 아니었다. 죽음을 이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을 이기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죽음 뒤에 부활이라면, 사망을 이기는 영생이 따라온다면 고난이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흔들렸던 삶이 다시 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이전까지 마음이 괴롭고 힘들어서 신앙의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사명의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뜨겁게 해 주셨다. 그러니까 흔들리던 마음이 자리를 잡고, 식었던 가슴이 뜨거워졌다. 예수님께서 부서질 뻔 했던 인생의 길을 다시 살게 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낙심하고 슬퍼하고 원망하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떡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마치 마지막 만찬 때에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나누었던 것처럼,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다.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눈이 밝아졌다. 묶여 있던 것으로부터 풀려나서 열려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성도는 은혜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같이 죽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참된 성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게 진짜 믿음이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악한 마귀의 권세를 이겨나가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어야 하고,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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