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복음에서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칭의”입니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칭의”란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움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움 때문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는 전혀 없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시 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눕혀서 데려 왔습니다.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워 있기만 했고, 사람들이 그를 메고 와서 지붕까지 뜯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막 2:5)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대단한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짊어지고 갔는데, 사람이 많으니까 지붕까지 뜯어서 병자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중풍병자는 누워 있기만 했을 뿐인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칭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했습니다.”(롬 3:23) 우리는 다 죄인인데, 죄사 함을 위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죄 값을 심판받아서 사망과 저주의 자리에 있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즉, 희생제물)로 삼으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25절을 중간부터 보십시요.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래 원문에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는 표현 이 26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25절은 “이는 하나님께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하게 하는 희생제물)로 삼아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신다는 것입니다.
“간과한다”는 말
사전적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대강 보아 넘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너그럽게 보아주셨다”로 번역했습니다. “간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시스’가 ‘유보하다, 연기하다’란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유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게 하셨다는 것입니 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뒤에 나오는 말과 모순이 됩니다. 25절을 다시 잘 보십시요. “이는 하나님께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은 “사랑”이지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의로움”입니까? 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 벌하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죄를 간과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간과하셨다”고 했습니다. 26절 말씀은 우리를 더 놀라게 합니다. 26절에서,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 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곧 이 때에”라는 것은 어느 때를 말합니까? 25절에서,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고 말한 “때”입니다. 26절을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길이 참으시는 중에, 곧 이 때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악을 계속해서 참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토록 오래 참고 계셨습니까? 죄를 미워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셔서 반드시 죄를 벌하셔야 하는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벌하기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범죄를 보면서도 오 래 참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면서도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마침내 참을 수 없어서 결단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그렇게 오래 참으 시던 중에, “(마침내)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기독교 복음에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 생명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죄를 그냥 넘기고, 용서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나타났다”고 말해야 합니다. 바울 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의로움이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5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을 붙잡고, 깊게 씨름해야 합니다. “간과하심”이란 죄를 용서하신 것 이 아닙니다. 죄를 그냥 ‘대충 보고 넘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파레시스’는 ‘파라’와 ‘헤 미’가 합쳐진 말입니다. ‘파라’는 ‘옆에서, 옆으로’란 뜻(의 전치사)이고, ‘헤미’는 ‘보내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보면, ‘파레시스’는 ‘옆으로 보내다’란 뜻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표현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옆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 죄의 책임, 죄의 값”을 내게로 보내지 않으시고, 내 옆으로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내 옆의 누구에게로 보내셨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예수님께로 내가 갚아야 할 모든 죄를 다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에 대한 책임, 죄의 형벌을 다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죽으신 이유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옆으로 보내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값을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죄의 형벌을 다 받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레시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죄의 값을 그냥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값을 다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26절이 전하는 진리입니다. 26절에서.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 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죄 값을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의롭다고 여겨주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이해되고 깨달아져야 합니다. 왜 입니까? 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피를 믿을 때 효력이 발생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구원이고, 누구나 천국 영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사람에 게 효력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28절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니까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27절을 보십시요.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위, 나의 공로, 나의 열심으로 이룬 것이라면, 자랑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구원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서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이 엄청난 은혜이고, 그 엄청난 구원의 은혜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믿는다는 것은 관계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성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관계의 회복이 누구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희생해서 관계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요 아브라함이 실수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희생해서 아브라함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창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말도 안 되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가나안 땅의 다섯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가나안의 다섯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돌라오멜의 침략에 대항 한 다섯 왕들이 싯딤 벌판에서 싸우지만 패배합니다. 당시 원정군의 힘이 대단했습니다. 네 나라가 연합한 군대였는데, “엘람”이라는 나라는 오늘날 ‘이란 지방’에 해당하는 큰 나라였습니다. 이란의 전신이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둘째가 “시날”인데, 후대에 ‘바벨론’으로 불려지게 될 나라입니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시날 왕 아므라벨”이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가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풍요를 누리던 “엘라 살”입니다. 넷째가 “고임”인데, 후대에 ‘앗수르’로 불려지는 나라입니다. 이 네 나라 왕의 연합군이 가진 힘과 능력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원정대가 가나안 중부지역, 동부지역을 거의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소돔, 고모라, 스보임, 아드마, 소알”의 왕들이 역청 구덩이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웁니다. 그러나 결국 패배했습니다. 재물을 노략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집에서 키우 병사 318명으로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그돌라 오멜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노략된 재물도 다 찾아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싸움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이 승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포로들을 구출했다는 기쁨도, 조 카를 되찾았다는 평안도 누리지 못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에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창 15:1절을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왜 그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까? 그돌라오멜 연합군 이 자기에게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전쟁에서 말도 안 되는 승리를 이루어 주셨는데, 다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인간의 연약한 본성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후손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대로 너의 인생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가문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없는 것처럼, 너의 자손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는데, 횃불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희생 제물을 둘로 쪼개어 놓고, 둘을 마주보게 한 다음에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쪼개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렸습니다. 왜 제물을 쪼개어 놓은 것이라고 했습니까?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맺을 때, 제물을 둘로 쪼개서 마주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맺는 사람들이 쪼개 제물 사이를 걸어갑니다. 그러면 언약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와 나 사이에 언약을 깨는 자가 있으면, 여기에 쪼개져 있는 제물처럼 쪼개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암소, 암염소, 숫양”을 둘로 쪼개서 마주보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횃불이 쪼개진 제 물 사이를 지나갑니다. “횃불”이 상징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언약을 맺는데, 만약 강대 국과 약소국이 언약을 맺을 때는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강대국의 왕이 높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 봅니다. 그러면 약속국의 왕이 쪼개진 제물 사이를 걸어간다고 했습니다. “내가 약속을 깨뜨리면, 여기 제물처럼 쪼개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 누가 제물 사이를 걸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횃불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횃불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언약을 이루는데 누가 쪼개지겠다는 것입니까? 연약한 인간이 쪼개져야 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쪼개지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반 드시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이루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 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범죄한 인간, 연약한 인간이 쪼개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 신 하나님 스스로 쪼개지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영혼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 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잘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하면, “말씀을 세우는 믿음이 되어야 한 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믿음이 약속의 말씀을 세우는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구원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믿음인지 폐하는 믿음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 사랑을 세상에 세우는 것인지 무너뜨리는 것인지를 따져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요.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요. 사람들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굳게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신뢰할 때, 그 말씀이 굳게 세워집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각이나 방법을 신뢰하지 않으면, 말씀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신자들이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 말씀이 굳게 세워집니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신뢰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진리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서 지금도 살아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이 굳게 세워집니다. 성도가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능력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불순종 하는 자녀에게 자신의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불순종하는 자녀에게 성령충만을 주시지 않 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과 부활의 주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 습니다. 그러니까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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