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믿음의 의로 된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14절을 보면,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결코 율법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믿음을 원하십니까? 아담의 범죄로 “믿음”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게 좋은 것입니다. “믿음”은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에 조건이 필요합니까? 믿는 것에 돈이 있어야 합니까? 믿는 것에 사회적 지위나 권세가 있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만이 죽 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통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 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절대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죽음을 초래한 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전까지는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즉, 죽음을 정복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죄를 이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부처도, 마호메트도, 공자, 맹자도 “죄를 이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문을 열고 나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죄와 사망을 이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부활의 열매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 어떤 철학, 어떤 종교로도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언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표현이 다르고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에 대해서도, 히브리어로는 ‘요수아’이고, 헬라어로는 ‘예수스’이고, 영어로는 ‘지저스’이고, 우리 말로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표현은 각각이지만, 믿음의 대상은 하나입니다. “구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 씀을 들은 후부터 자신의 삶을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살았 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은 후부터 “세상에 대한 믿음, 사람에 대한 믿음, 심지어 자신에 대한 믿음”까 지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17절을 보면,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불가능을 가 능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까? 그게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건이라는 것을 보았습니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한 바로 그 사건들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의 때가 되면, 죽었던 여러분의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마음으로 보여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했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을 간직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특히 보이지 않는 대상을 믿을 때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믿음도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믿음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이성적인 판단하고 계산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보고, 자기를 의지 하고, 자기를 주장하면 안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요.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보면, 자기를 돌아보면 죽은 것 같습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자기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보지 않고 무엇을 보았습니까? 20절 말씀을 보십시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보지 않고, 약속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또한 이성이나 자연법칙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상황, 자기 형편을 보면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 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항상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네~ 아멘!’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의심 이 일어날만한 사건들과 만납니다. 그때,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다 맡겼다고 했습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를 다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신 뢰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 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4:20)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브라함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따랐습니까? 그는 넘어진 적이 한 번도 없 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못하고, 하갈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19절입니다. 19절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그가 백 세나 되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백 세가 되었을 때, 오히려 더욱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입니까? 넘어졌을 때,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하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때 어디를 보아야 합니까?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J.D 그리어가 “믿음은 넘어졌을 때,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믿음은 넘어졌을 때,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절대로 넘어지지 않은 것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도 있는데, 그때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 날 수 있어야 합니다. 위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실수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는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넘어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붙잡고 다시 일어났습니 다. 그래서 바울이 20절에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단단해진 것입니다. 잠 24:16절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넘어져 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언약을 붙잡고,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 다. 맥스 루케이도는 고난이나 질병이 왔을 때, “왜?”라고 묻지 말고, “무엇?”이라고 물으라고 했습니 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라는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 서 무엇을 바꾸려고 하시는 것입니까?”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사는 길입니다.
열심히 주의 일에 봉사했는데 몸이 아프다고 해보자. 역사적인 눈으로보면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이 깨달아집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행동했습니다. 반대되는 모든 상황, 죽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믿었습니다. 21절을 보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확신했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이와 같아야 합니다. 넘어졌어도 다시 약속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음을 경주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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