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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성령에 붙잡히라, 거기에 답이 있다.(신 16:9-12)


마음이 중요하다.


칠칠절을 지킬 때의 마음 가짐이 중요합니다. 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칠칠절을 지키는 세 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첫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라고 했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식이 첫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삶, 성도가 드리는 모든 감사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둘째가 “네 힘을 헤아려”입니다. 히브리어 ‘요데카’는 본래 ‘네 손으로’란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손”을 힘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에, ‘네 힘으로’가 됩니다. 요데카를 우리 말로 번역할 때 ‘네 힘을 헤아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네 힘으로’라는 말은 힘을 헤아려서 알맞게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 힘껏, 네 힘이 닿는대로’ 드리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라고 했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힘이 닿는 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12절에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하이타’ 동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종이 되었던”이란 뜻이 아니라 “종이었던”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이 되었던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이었던” 과거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400여 년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자기들의 수고와 열심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노예”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대가를 받을 수도 없었고, 자기가 추수한 것으로 기쁨의 축제도 벌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자기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수고해도 대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수고의 열매가 자기에게 주어집니다. 이게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원리로 “자원하는 마음”이 따라 붙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대로 “힘껏” 드리는 것이 마땅한데, 그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때를 기억하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은혜, 구원!


여러분, 이게 신자가 받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러분이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수고해도 천국을 얻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수고해도 다 지옥의 사망으로 가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말했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롬 5:12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열심히 수고해도 사망으로 간다는 말입니까? 내가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억울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노예의 운명”인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의 노예”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좋아서, 교인들이 좋아서, 목사가 좋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문제가 극복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수고해도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수고의 돈을 받습니다. 그것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수고한 모든 것을 다 남겨두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죄와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보혈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게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로 홍해를 건너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완전히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축복이다.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받지 않으면, 결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로 끝나버립니다. 전 1:2절과 3절에서, 솔로몬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12:7절과 8절에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학업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인생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축복이라고 하면, 애굽의 바로 왕도 받았고, 북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뤘던 여로보암 2세도 받았습니다. 헤롯 왕이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 같은 사람들도 받았습니다. 그런 것이 진짜 축복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나머지가 잘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삼서 1: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범사가 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잘 되면,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가 받는 모든 것은 정당한 대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당한 대가 이상의 것입니다. 신 12:10절을 다시 보십시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수고하고 받는 것은 대가가 아니라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어가 다릅니다. “내가 수고해서 대가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수고한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대가로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수고해서 성취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10절에서, 세 번째 원리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밋싸트’는 본래 ‘예물’이란 뜻이 아니라 ‘넉넉한’이란 뜻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힘이 닿는 대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다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맞습니다. 여러분이 천국 영생을 선물로 받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선물입니다. 이 땅에서 조금 더 수고하는 사람도 있고, 덜 수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에서 확인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와서 열심히 수고한 사람도 있고, 늦은 시간에 와서 조금 일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젊어서부터 신앙생활하면서 열심히 수고하신 분도 있고, 뒤늦게 신앙생활면서 덜 수고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수고하든지, 여러분이 누리게 되는 구원의 영광은 수고의 정당한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엄청난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감사절을 지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려면 성령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연약합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놓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놓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생각이 앞서야 합니다. 그게 지혜로운 삶이고, 더 풍성한 축복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란 성령께 붙잡힐 때 가능합니다. 자기로서는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신약에서 언제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했습니까? 칠칠절, 즉 “오순절”에 임했습니다. 감사하는 절기에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감사가 계속해서 이어지려면, 성령이 역사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여러분,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요. 이 둘의 차이는 무엇에서 나타납니까? 바라보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죄에만 집착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아겔다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주님의 약속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있는 죄에 잡히지 않고, 생명의 약속에 붙잡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약속에 붙잡히니까 회개가 일어나고,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사명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룟 유다처럼 문제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 고난들, 현실들, 삶의 무게들에 붙잡혀서 삽니다. 그러나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오직 주님입니다. 그 주님이 역사하면서, 주인이 되시면,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게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끝까지 붙들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 붙잡혀야 합니다.

말씀 제목처럼, 성도는 “무조건 성령에 붙잡혀야 합니다.” 거기에 인생의 답이 있습니다. 성령께 붙잡히면 시선이 달라집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성령의 지혜로 풀립니다. 어렵고 힘든 고난이 섭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련과 환난을 성령의 능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은혜고 축복인 것을 성령이 알게 하십니다. 감사로 인생을 해석하게 합니다. 거기에 더 풍성한 감사가 있게 하는 역사도 나타나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붙잡히면, 성령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아름다운 예수 생명”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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