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었다라고 하는 게 이제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에서의 후손인 에돔이 길을 열어주지 않아 홍해 길을 따라 우회하게 되는 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원어적으로 마음이 짧아졌다’ 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하더라도 웬만한 일은 다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원망과 짜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망과 짜증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만족이 안 될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민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셨고 이 광야에서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공급받으면서 그들을 살리게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것임에도 그들을 죽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살게 하시는데 그 은혜로 살게 하시는 거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죽게 하신다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망과 짜증은 내가 주인일 때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내가 주인일 때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안될 때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민수기 21장 말씀은 히브리어로 ‘따바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바르의 변형된 형태를 사용하는데 이 따바르는 본래 ‘말한다’는 뜻입니다. ‘따바르’에 전치사를 붙이면 하나님과 모세에게 대항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대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아를 주장하는 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화를 내시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아를 주장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자아의 주장은 결국은 나를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와 똑같은 죄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아의 주장을 심각하게 여기고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은 틀린 것이 됩니다. 결국 내가 의롭다고 느끼고 하나님은 불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거기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곧, 자아를 미워하고 자기 의를 버리는 것입니다. 회개의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입니다. 교통 표지판의 유턴을 보고서 차가180도 회전해서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메타라고 하는 말은 초월한다는 뜻이고 노이아는 지식과 생각을 뜻합니다. 메타노이아는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생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생각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경륜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 지식과 생각과 능력으로 사는 게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인생이 살아진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광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막 다른 길목까지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상태가 될 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면 누구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민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으니 이들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말한 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문제는 범죄가 극복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민21:8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고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라는 것입니다. 보라는 의미의히브리어‘라’는 그냥 훑어보는 게 아니라 주목해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쉬우면 이세상 사람들이 모두 구원 받았을 것입니다. 그 놋뱀은 자기가 주인되려 했던 내모습이기에 이것을 꿰뚫어 보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생명의 원천이고 주인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걸어버리는 것입니다. 장대에 걸린 불뱀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9절 말씀에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2: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려 죽은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내가 매달렸어야 하고 내가 피를 흘려야 했었는데 대신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고 나대신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면서 내가 장대위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매달려 계시는 것과 내가 이미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자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날 수가 없기에 내 안에는 생명이 없으니 나를 살려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요청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기 원하시기에 계속 코너로 몰고 가십니다. 절대로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 구하는 자로 살기 원하시기 때문에 은혜 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겸손한 길로 계속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는 생명이 없고 빛이 없습니다. 우리안에 존재하는 어둠에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들어와야만 빛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 구하는 자로서 밖에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그래서 죽어야 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놋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자기를 부인하면서 바라보는 자는 사는 것이고 여전히 자기를 주장하는 자들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면 사랑하게 되고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면 내가 용서받고 구원의 은혜가 임했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내가 용서받았으니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내가 사랑받았으니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용서가 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회개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회개의 자리가 아닌 정죄의 자리에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성도들을 회개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죄의 자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어린 양 예수님 그분께 내 인생과 생명을 걸고 십자가로 인생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므로 이제는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내 눈은 세상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건 고단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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