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로 했으면, 아브라함처럼!


믿기로 했으면, 아브라함처럼!(창 19:1-11)


성도의 모범은 아브라함이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쓰임받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롯과 같이 부끄러운 구원에 만족하면 안 된다. 롯은 구원받았지만, 롯의 후손인 암몬과 모압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의의 도구가 되지 못하고, 그 앞길에 방해가 되는 부끄러운 존재로 끝나고 말았다. 무엇이 그들의 삶을 갈랐을까? 그것은 영접의 차이였다. 그 차이가 두 사람의 길을 갈랐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1.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롯은 부분적으로 영접했다.


롯은 천사들을 영접할 때 성문에 앉아 있었다. 1절,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소돔 성에서 성문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시나? 소돔 성에서 성문은 사교를 나누던 곳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과 사귐을 나누는 곳이었다. 롯은 사람들과 사귀는 화려한 욕망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영접했다. 롯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의 부분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과 사귀면서 그들과 나누는 기쁨도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도 소통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다. 롯은 소돔도 받아들이고, 하나님도 영접한다. 두 마음을 품은 부끄러운 영접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진정한 영혼의 만족이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접한 곳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사이였다.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들 사이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그는 장막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상수리나무들 사이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달려 나갔다. 아브라함은 장막 문 앞에 앉아서 상수리나무들, 곧 자기가 예배드리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접했다.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영적인 생각을 하면서, 영적인 곳을 바라보다가 하나님과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가 있으신가?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인가, 아니면 모든 것 되시는 전부인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깊어지려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려면,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


2. 손님으로 영접했느냐, 주인으로 영접했느냐는 차이이다.


롯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나그네로 영접했다. 그냥 손님으로 맞아들였을 뿐이다. 그래서 손님에게 맞는 예의 정도를 차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전혀 달랐다. 그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지나가는 나그네나 손님으로 맞아들이지 않고, 주인으로 영접해서 모셔 들였다. 앤드류 머레이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전부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당신의 마음을 드렸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드려야 할 것이 또 있다. 당신의 머리, 즉 온갖 생각으로 가득한 당신의 머리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의’라는 것이 있다. 자기 안에 율법적인 자아가 살아있는데, 그것이 우리를 자꾸 교만하게 하려고 한다. 앤드류 머레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그는 ‘우리가 온갖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모든 죄의 뿌리인 완고함과 교만에서 반드시 건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은 겸손이다’라고 했다.


생각해 보시라.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일까? 내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내 판단과 경험으로 보니까 안 될 것 같으니까 염려한다. 왜 미워하고, 왜 비방하는 것인가? 내가 싫은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비방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아가 하는 행위들이다. 성도는 자기의 소원과 명예를 그리스도께 넘겨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인 되시도록 해야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영접하면서 누구를 만족시켰느냐에 차이가 있다.

누구에게 기쁨이 되고, 누구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느냐가 두 사람의 차이다. 롯이 천사들에게 간청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롯이 “간청하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페차르’인데, ‘밀어 붙이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창 19:9절에서 다시 한 번 사용되는데, 소돔 사람들이 롯을 밀치면서 들어올 때이다. 소돔 사람들이 “롯을 밀치며”라고 할 때, ‘페차르’라는 단어를 썼다.

사람들이 왜 밀어 붙이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밀어 붙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내 마음이 만족하기 위해서, 내 마음이 시원해지기 위해서,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상대의 마음에 신경쓰지 않고 밀어 붙인다. 그러니까 롯이 나그네들을 영접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접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는 영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어땠을까? 창 18: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완전히 롯과 다르다.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마음이 만족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는 나그네들을 격려해서 마음이 시원해지기를 기대했다. 아브라함은 단지 나그네에 대한 의무감에서 영접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내 기분이나 나의 만족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다. 내가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이 자기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면, 그것이 자기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누구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나? 누구에게 기쁨이 되는 인생이 되어야 하나? 하나님이어야 한다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될 때,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다. 대상 18:13절에 중요한 말씀이 선언되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는 말씀이다. 다윗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다윗을 이기게 해 주셨을까? 그 이유가 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도 세상을 이기게 하는 믿음이 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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