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차원만큼 인생의 깊이가 달라진다.(막 16:14-18)


부활의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신앙이 구원의 반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면 구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부활신앙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믿지 못했습니다. 14절을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셨다고 했습니다. 일반인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믿음 없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완악한 것”입니다.

1절 이하를 보면,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9절에서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12절에는 제자들 중에서 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을 믿지 않은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이 믿지 못한 것입니까? 첫째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만나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나 두 명의 제자들이 보여준 특징이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마리아가 가서... 이 일을 알렸다”고 합니다. 13절을 보면,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서,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찾아갔고, 부활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것이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찾아가서 알립니다. 믿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니까 증거의 삶으로 흘러갑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만남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보여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보여지지 않던 것들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보여지지 않던 나의 죄가 보여지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여지지 않던 말씀이 보여지는 것이 믿음이고, 주님의 섭리가 보여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씀이 보여지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지는 것입니까?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보이지 앟고,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와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더라도 딱 하루입니다. 이 날에만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면 살고, 만나지 못하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습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면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주님은 “사데 교회”를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카이 네크로스 에이’라고 하는 헬라어 표현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빠르게 죽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습니까? 만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없으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신앙이 빠르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만남을 체험한 성도는 영혼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과 만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주일 예배를 통해서, 제가 전하는 말씀을 만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꾸준히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2,000년 전의 언어로 쓰여진 책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생도 독학으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옛날 유교경전을 서당에서 배운 것처럼, 말씀을 예배당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받은 비전을 나누고, 사명을 나누고, 믿음의 삶을 공유해야 합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 이치입니다. 큰 배가 목적지를 향해서 제대로 항해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항해사는 항해사로, 조타수는 조타수로, 기관사는 기관사로,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은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순종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과 만나지 못하면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면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남이 중요합니다. 예배에서 주님의 임재와 만나야 하고, 말씀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과 만나면서 자기의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말씀으로 농기구를 삼아서 자아에서 자라는 쓴 뿌리를 하나씩 제거해야 합니다. 농사짓는 농부가 잡초를 계속해서 뽑아냅니다. 이 잡초라는 게 뽑아도 계속해서 자랍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매일 아침마다 논, 밭으로 나가서 잡초를 뽑아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아도 매일 같이 잡초가 자랍니다. 그것을 말씀으로 뽑아내야 합니다. 기도로 뽑아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믿지 못한 두 번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음이 완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는 ‘스클레로카르디안’입니다. 카르디아가 마음이라는 뜻인데, 본래는 “빈 항아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빈 항아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무로 똑같은 통을 만들어도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숟가락 젓가락을 담으면 수저통이 되고, 휴지를 담으면 휴지통이 됩니다. 연필을 담으면 필통이 되고,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보석을 담으면 보석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악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빈 항아리와 같은 마음에 ‘스클레로스’가 담겼다는 것입니다. ‘스클레로스’는 ‘거친, 굳은, 사나운’이란 뜻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거칠고 굳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거칠게 굳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 6:60절을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뒤에, 기가막힌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난 제자들 중에서 “이 말씀이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표현이 ‘스클레로스’입니다.

왜 제자들 중에 말씀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기준”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충족되지 못하니까 믿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이 신앙의 기준이 된 것이 아니라, 자아가 신앙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못합니다.

자기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자기를 만족시키는 말씀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완악한 마음”입니다. 이 완악한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자아에서 자기의 기준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여러분의 기준으로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요. 말씀을 그대로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사데 교회가 거의 책망만 받았지만, 그래도 아주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예 건질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책망만 남은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서 출발한 것입니까? 사데교회에 “아멘”이 없었습니다. “아멘”이 사라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이 사라지고, 열심이 사라지고, 복음전도가 사라진 것입니다.


믿으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요.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두루 전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만나서 보고 믿으니까, 완악한 마음을 자기 안에서 없애버리니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에 무엇이 나타납니까?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함께 역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역사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도움을 주십니다. 함께 일하십니다. 역사하셔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차원만큼 인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십시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5절에서 예수님이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릅니다. 어떤 표적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악한 영의 권세를 물리친다는 뜻입니다. “새 방언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 “방언”이 맞습니다. 그런데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방언”이 필요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하늘의 신령한 언어일 수도 있고, 복음전도에 필요한 지혜의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여기서 말하는 “방언”을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순종의 삶, 복음전도의 삶에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18절에서는 뱀을 집든지 독을 마시든지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사람의 인생을 보호하시고, 신앙을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진짜로 독사를 집어들고 독을 마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믿음의 길, 순종의 길을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병든 사람을 고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능력입니다. 복음전도에 능력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치유와 회복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순종입니다. 복음전도입니다.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갈 때, 능력과 지혜와 권능이 체험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