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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열리는 열매는 없다.(출 12:37-42)


죽음을 넘어간 사람들


오늘 본문에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애굽에 내린 10번째 재앙에, 애굽 왕 바로가 두손을 들었습니다. 애굽 전역에 통곡하지 않는 집이 없었습니다. 모든 집에 죽음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집에는 죽음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구원이 임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죽음을 넘긴 자들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4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간 중에서 많은 세월,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절망적인 현실에 부딪혔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출 2:23절에서,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노동이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이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고, 행복이 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노동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고된 노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디지’(bondage)입니다. 강제 노역, 노예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탄식과 부르짖음”이 나왔습니다. 오랜 세월 고통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조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애굽이라는 곳은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이라는 물질과 번영이 고통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번영이 심판처럼 느껴져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심판을 넘어서 구원의 생명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애굽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에서 살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시대나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내 인생의 구원, 행복, 기쁨”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모든 삶의 환경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구원을 요청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로, 보혈의 권세 아래로 옮겨지게 됩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배성이 “어린 양의 피 권세” 안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 권세 아래에서 구원받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대속과 전가의 은혜를 깨달으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권세, 보혈의 권세를 반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대속의 은혜’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속이 “죄의 전가”임을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가”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대속”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기독교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이 중요한 것이 “전가”입니다. “전가”란 무엇입니까? 옮겨지는 것입니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죽음이 어린 양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죽음이 “속죄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나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서 감사합니다.’는 기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나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만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안에서 같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가”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은 생각하면서, ‘전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나를 분리시켜서, 바라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인데, 주님만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신앙이 ‘액츄얼리티’가 되지 않고, ‘리얼리티’가 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와 나를 자꾸 분리시켜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나는 죽지 않고, 내 대신에 예수님만 계속해서 죽으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자기를 분리시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의 십자가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은 리얼리티로 가면 안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버츄얼 리얼리티”는 있어도, “버츄얼 액츄얼리티”는 없다고 합니다. ‘버츄얼 리얼리티’가 요즘 말하는 ‘가상현실’입니다. 리얼리티는 ‘가상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액츄얼리티’는 가상현실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관계, 개인적인 관계, 지속적인 관계가 ‘액츄얼리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지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갈라디아서 2:20절의 선언, 사도 바울의 외침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지속되는 사람이 축복의 땅,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고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생활에 축복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크기보다 영광의 크기가 훨씬 큽니다. 시련과 환난이 있다면, 그보다 훨씬 큰 축복과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열리는 열매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열매가 나와서 자라기까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열매가 맛있는 열매로 익어지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믿음으로 열매를 결산하라.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믿음으로 경주하는 삶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잡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수많은 잡족들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잡족” 출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가? 누구입니까? 제가 성경에 가장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렙”입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 갈렙을 소개할 때, 아주 의도적으로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니스 사람’, 이게 갈렙의 출신 배경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횃불언약”을 맺습니다. 그러면서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의 땅을 말하면, “겐 족속, 그니스 족속, 갓몬 족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니스 사람”이란 오래 전부터 팔레스틴 주변에서 살던 에돔 족속 중에 하나였습니다. 언약의 후손인 야곱의 계열이 아니라, 에서의 계열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잡족 출신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정탐했습니다. 민 13:3절을 보면, 가나안 정탐꾼으로 선발된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로쉬’는 ‘백성의 지도자’란 뜻입니다. 갈렙은 잡족에서 출발했지만, 유다 지파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사에서 장자권을 계승한 지파가 유다 지파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가장 앞장서서, 가장 적극적으로 싸운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남유다의 왕들이 유다지파입니다. 그 유다 지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 지파에서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그가 일생을 믿음으로 경주했기 때문입니다. 수 14:8절에서, 갈렙은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충성하였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말레’인데, 이는 ‘만족시켰다, 힘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 자기의 온 힘을 다했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도, 여호수아 앞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나이 팔십 오세로되)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수 14:11) 나이가 팔십 오세가 되도록, 일생을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경주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녹슬면 안 됩니다. 녹슬어서 없어지면 안 됩니다. 인생도 믿음도 녹슬어서 사라지면 안 됩니다. 불타서 사라져야 합니다. 조지 휫핏드에게 사람들이 “좀 쉬면서 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조지 휫필드가 한 말입니다. “녹슬어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닳아서 없어지는 망치가 되고 싶지, 녹슨 망치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언약의 땅, 축복의 땅을 통째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갈렙이 그랬습니다. 제비뽑지 않고, 약속의 땅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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