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불려진 ‘워렌 위어스비’는 “구원의 증거는 열매이다”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원의 증거는 말씀을 듣는 것도, 말씀에 일시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심지어 삶에서 말씀이 자라도록 가꾸는 것도 아니다. 구원의 증거는 열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 7:16)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나가야 한다. 열매에도 아름다운 열매가 있고 나쁜 열매가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 열매가 무엇이라고 했나? ‘칼로스’라고 했다. 목적에 딱 들어맞는 열매라고 했다. 주인의 목적에 들어맞는 열매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증거는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있다. 그 열매란 “아름다운 열매”이다. 신앙의 열매가 “주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요 15장에서 열매를 내지 않는 가지는 제거해 버린다고 했다. 그러니까 열매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 열매란 주인의 목적에 들어맞아야 한다. 열매를 내기는 했지만, 주인이 목적하는 열매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나? 뽑혀서 버려지게 될 것이다. 사 5장을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포도를 기대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맺은 열매가 들포도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황폐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열매를 내야 한다. 좋은 열매를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동을 하더라도 목적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열매를 내려면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안 된다. 열매를 내기 위한 목적에 따라서 행동하는 실행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씨앗을 돌밭이나 바위에 뿌리면 안 된다. 나무에 거름을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나무뿌리가 아니라 가지에 거름을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 그런데 열매맺는 가지가 아니라 열매맺지 않은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 이렇게 목적에 맞는 행동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듣고 행하는 믿음이 반석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 7:2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여기서 “듣고 행하는 자”가 중요하다.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다 한가지이다. 듣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듣고 행하는 사람”이 핵심이다. 듣고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다.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존 맥아더는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는 믿음이 진실하고 살아 있으며 생력력이 넘친다는 유일한 증거이다.”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도 “참 믿음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생활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는 것은 신앙에 대한 완벽한 정의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죽은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능력을 체험하고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절대 비밀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로 그렇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안 되던 사람들이 와서 되는 곳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이다. 마음이 괴롭던 사람들이 와서 평안을 얻는 곳이 교회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누구든지 기적을 체험하는 곳이 교회이다. 병든 사람들이 와서 치유받고, 문제있던 가정이 회복되고, 답답한 삶이 변화를 받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음부의 권세가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함이 있다. 왜 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나? “듣고 행하는 것”이다. 누구의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인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성도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마 7:21절에서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비결이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집을 짓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시라. 두 개의 집은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똑같은 모양, 똑같은 구조, 똑같은 환경에 세워졌다. 똑같은 환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집들이 똑같은 시련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집들은 똑같이 비바람을 맞고, 홍수를 맞는다. 그 집들은 구조도 모양도 환경도 같다. 그런데 하나는 무너지지 않고, 하나는 무너진다. 이유가 무엇인가? 기초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초가 중요하다. 오늘 설교 제목이 “반석 위에 세웠으면 비바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을 교훈하고 있다. 반석 위에서 세워져 있으면, 비바람이 불고 홍수를 만나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난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시련과 환난이 피해간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그런 것을 만나다. 시련과 환난을 똑같이 만난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고후 4장에서 그런 말씀을 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9)라고 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이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반석”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해야 한다. 어떤 분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인생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석”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그냥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듣고 행하는 믿음”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신앙의 결국은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붙잡아야 한다. 그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나 제가 예수님을 꽉 붙잡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꽉 붙잡아야 한다. 28절을 보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여기서 “놀랐다”(에크플렛소)는 것은 격투기 선수가 펀치를 맞고 그로기 상태가 된 것과 똑같다. 사람들이 정신이 나갈 정도로 놀랐다고 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29절을 보면,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했다. “권위”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다른 권위를 가지고 계셨다. 서기관들은 말씀을 읽고, 인용하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권위”가 있으셨다.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했다. 단순히 인용하고 해석하신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신 것이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말씀으로 끝내는 의도가 무엇이겠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권위를 붙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처럼 놀라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단단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붙잡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 수 있다. 그러면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따라붙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결론이 무엇이 되어야 하나?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의지, 여러분의 노력을 다 맡겨야 한다. 예수님에게 인생을 걸어야 한다. 예수님의 목적과 생각과 말씀과 의지와 삶의 방향에 여러분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반석 위에 세워지는 집이 되게 하시라. 그러면 된다. 무엇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여러분의 믿음과 삶이 그렇게 흘러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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