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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이라고 두려워 말라, 역전의 기회가 있다.(출 3:1-12)


광야 40년 동안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오늘 말씀에 호렙 산이 나옵니다.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 장면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출 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고 3개월 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합니다. 이후부터 이 산의 이름이 시내 산으로 불려집니다.

성경은 호렙 산과 시내 산을 혼합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산에 대한 견해들을 간추려 보면, 명칭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같은 산입니다. 한 산에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하나는 호렙이고 다른 하나는 시내입니다. 호렙이라는 이름의 뜻이 ‘메마른’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문제가 많은 인간의 메마른 인생, 광야와 같은 인생과 같습니다. 그 메마른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만나러 오시니까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부릅니다. 1절을 보십시요.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했습니다.

이 무렵 모세의 나이가 80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처가살이를 하면서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을 노예처럼 살았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때 엄청난 가축 떼를 모았습니다. 창 32장을 보면, 에서에게 화해를 구하는 예물로 드린 가축의 수가 나옵니다. “암염소가 이백, 숫염소가 이십, 암양이 이백, 숫양이 이십,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가 이십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창 32:14-15)고 했습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이게 20년을 노예처럼 일하면서 모은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지만, 자기의 양 떼를 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40년 동안 자기가 주인으로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자기는 청지기로 남의 양 떼를 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청지기 의식”으로 단련시키신 것입니다. 이후로 모세는 40년 동안, 즉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동안 자기의 양 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 떼인 이스라엘을 치는 자로 삽니다.

광야와 같이 메마른 인생


여하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는데, 뭐 별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전부였습니다. 광야에서 정말 광야와 같이 메마른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1절에서 모세가 양 떼를 데리고 “광야 서쪽”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게 모세의 인생을 보여주는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광야 서쪽”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하르 함미드빠르’인데, 본래 ‘아하르’는 “서쪽”이란 뜻이 아닙니다. ‘아하르’는 ‘뒤쪽, 끝 부분’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요엘서 2:3절을 보면,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들의 뒤를 태운다”고 할 때, 뒤가 ‘아하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에서 동쪽은 항상 앞이고, 서쪽은 항상 뒤입니다. 성막의 입구가 동쪽을 향하는데, 여기를 앞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성소가 성막의 서쪽에 있는데, 여기를 뒤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번역할 때, 의역해서 “광야 서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의미로는 “광야 끝, 혹은 광야의 뒷 부분”이란 뜻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광야의 벼랑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인생이 광야에서도 가장 끝 부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갑니다. 광야의 벼랑 끝에서 호렙 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호렙”이란 말은 “광야의 끝”이란 표현보다 더 나간 표현입니다. “호렙”은 ‘하라바’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타다, 파멸하다, 마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뜨거운 태양으로 메말라 버린 곳, 생명을 파멸시켜 버리는 곳, 그래서 메마른 광야의 절망을 보게 하는 곳이 “호렙”인 것입니다. “호렙”은 “목마른 상태의 광야 인생”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거기로 모세가 양 떼를 몰고 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으로 인도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숙곳에 진을 칩니다. 그리고 출 13:20절을 보면,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칩니다”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끝”으로 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서, 이후로 호렙 산에 도착합니다. 출애굽 이후로 3개월 만입니다. 그런데 이 때는 이 산의 이름을 호렙으로 부르지 않고, “시내”로 부릅니다.

히브리어 “씨나이”는 ‘가시나무 숲’이란 뜻인데, 거칠긴 하지만 ‘숲, 초원’이란 의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법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동행하신다고 약속하실 때 “시내 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명이 시작되는 숲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의 1년 가까이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막을 세우고, 인구를 계수하고, 광야의 행진을 준비했습니다.

메마른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서 역전되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 문제투성이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는 “호렙 산”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고 내려오게 되면 “시내 산”이 되는 것입니다. 메마른 인생이 되어서 올라갔다가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푸른 초원”이 되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됩니다. 모세가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벼랑 끝이라고 두려워 말라, 역전의 기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거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인도를 받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호렙에서 이상한 현상을 만났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떨기나무란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카시아 종류의 가시덤불입니다. 열매나 잎이 없고 뾰족한 가지만 나와 있는 무가치한 나무, 존재감이 없는 나무입니다. 당시에 마치 노예 민족으로 굴욕적인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합니다. 이 떨기나무는 그것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무가치하고 존재감이 없는 가시덤불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니까 존재감이 달라졌습니다. 모세의 눈에 아주 특별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애굽에서 박해와 고통으로 신음하던 이스라엘에게 임하실 것이라는 상징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주목받는 백성, 구원받아 능력의 삶을 사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복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자체로는 가치없는 나무, 존재감이 없는 가시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달라붙어서 연합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사망의 존재였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되고, 군사가 되는 것입니까?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이 연합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연합은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자기는 가시나무처럼 무가치한 존재, 메마른 존재, 죄와 사망의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주님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싸인을 잘 보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싸인을 보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약간의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분의 목적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의 거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라고 했습니다.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보여주시고, 배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장차 있을 언약을 보여주시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에게 “너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여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 가나안 7족속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시고, 그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가 이렇게 좀 해 볼래?”라고 묻지 않으시고, “이렇게 해라!” 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너희들 나를 따라올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마 4:19절을 보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 삼으실 때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세리였던 레위, 즉 마태를 부르실 때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의 대부분이 명령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헨리 블렉가비 목사님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싸인을 잘 보아야 합니다.(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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