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것을 자랑하지 말라.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의 스펙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것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별명이 “할례파”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사로서 그런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할례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를 자랑했습니다. 혈통을 자랑하고,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고, 자기의 배움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런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도 육적인 것을 자랑하라면 할 것이 많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할례파들의 방식으로 자랑하자면,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명한 3대 스승 중에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의 수제자였습니다. 율법에 능한 엘리트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북이스라엘이 10개의 지파 연합으로 독립할 때, 끝까지 유다 지파와 함께 남왕국 유다에 남았던 지파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중에서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랑할 만한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7절을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값진 것을 발견했으면, 스스로 자부했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요? 우리가 물건을 버릴 때도 아쉬움을 가지는데, 그는 값지게 여기던 것을 버리면서 미련없이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8절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하고 고상해서 다른 것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라.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8-9절)고 했습니다. 즉,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행복과 가치가 발견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나 성취에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나 가정에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치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가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잡힌 바 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이고, “사명”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맡겨진 사명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디오코’는 ‘목표를 붙잡기 위해서 빠르게 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달리기 경주에서 이기려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상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요. 목표를 달리는데, 힘을 아끼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의 온 힘을 다해서 달립니다.
경기력이 좋은 선수, 즉 실력이 있는 선수는 예선에서 힘을 아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기력이 떨어지는 선수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선이라도 온 힘을 다 써야 합니다. 달린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디오코’는 힘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을 위해서, 마지막을 위해서 힘을 아껴두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에 계속해서 열심히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어떤 결의가 느껴집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요.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경기장에서 뒤를 돌아보면,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비유해서 말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자랑할만한 스펙을 버렸습니다. 율법의 의로 자기를 의롭게 하려던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과거에 지었던 범죄 행위들, 교회를 박해했던 죄악들도 버렸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이후에 행했던 수많은 성과와 업적들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주실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보여야 한다. 보면 끝까지 간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자기가 잘못된 율법적 자아를 붙잡고 살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죽이려던 눈이, 영혼을 살리려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독사의 눈이 죽은 영혼을 보는 긍휼의 눈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속의 눈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심판의 마지막 시간에 있을 부르심의 상이 보이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끝을 향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을 가려고 할 때 성령이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행 20:2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달려가는 길에 환난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행 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알르 우데노스... 포이우마이’, 이 말의 본래적인 뜻은 ‘이런 것들이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KJV 성경이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None of these things move me.”입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런 것들이 나를 흔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느다.”고 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바울도 아프게 했습니다. 그는 매를 맞으면서 아픔을 느꼈습니다. 여러 박해와 환난 중에 아픔을 느꼈습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프지만, 고통스럽지만,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면서, 달리고 또 달린 것입니다.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푯대를 향해서 계속 힘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까? 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말씀이 보여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려는 “비전”이 보여야 합니다. 보이면 끝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면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중간에 그만둡니다. 포기합니다.
말씀이 보이면 끝까지 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사명이 보이면 끝까지 갑니다. 구원받은 자의 영광, 부르심의 상급이 보이면 끝까지 갑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보이고, 비전과 사명이 구원받은 은혜와 상급이 보이기를 힘써 기도하는 성도다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보이게 해달라고 열망하고, 또 열망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중보해 달라고(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말씀을 보고, 비전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는 성도가 되십시요.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보이고, 영광이 보이고, 사명과 상급이 보여서, 끝까지 충성스러운 신자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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