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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롬 3:10-18)


[성전 꽃예술 해설: 매일 기도하게 하소서, 그 기도가 열매처럼 풍성하게 하소서~!]

우리는 로마서 3장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론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 며, 사람은 다 죄인이다”라는 기준에서 복음을 말합니다. 롬 3:4절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 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참”이라는 헬라어 ‘알레떼스’는 ‘진리’라는 뜻을 가진다 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 간을 구원하는 진리,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행 4:10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바울도 롬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롬 3장에서 인간의 절대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편과 이사야 서를 인용하면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1절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했습니다. 시 14편을 인용한 말씀입니 다. 시 14: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생들을 살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려고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 14:3절에서,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 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한 사람의 “의인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 습니까?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만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본질적인 기능이 정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행하면 의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의롭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인임을 밝혀주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러면 뭐하러 율법을 지키냐?”라고 하면서, 율법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623개의 법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열심히 지키려고 해도, 결 국에는 율법의 의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 2:10절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법을 다 지키다가 딱 하나를 범하면, 범죄자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이 세상보다 엄격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고전 15:58절에서,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 죄를 과녁으로 삼아서 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죄를 향해서, 사망의 화살이 날아 옵니다. 죄 가 없으면 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기 때문에 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 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입니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죄를 향해서 쏘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의 기준이 무엇겠습니까? “율법”입니다. 앞서 고전 15:58절에서, 바울은 “죄의 권능이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가 율법에 따라서 권능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다니는 길에 과속에 대 한 기준이 없으면, 시속 50km로 달리든지 200km로 달리든지 범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속 50km 속도제한”이라는 법이 있으면, 속도를 위반했을 때 범죄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율법이 있습니다. 말씀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게 죄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정한 죄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첫째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 죄입니다. 둘째는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으면 죄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 게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으면 죄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도 죄라고 했습니다. “미워하면 살인, 탐심을 품으면 도둑질,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요 16:9절에서,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굳이 신구약의 율법을 모두 적용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네 가지 범주에 여러분을 비춰 보십시요. 모든 범주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의로운 자입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의로움이나 의인이 된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에 전하는 불편한 진리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선을 행할 수 있다,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론은 그것을 부정합니다. 타락한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까지는 노력과 열심으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안 됩니다. 더욱이 구원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망”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썩은 시체 냄새와 같이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 언어조차 더러운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롬 3:13절을 보십시요.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생활을 “목구멍, 혀, 입술”로 구 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구멍이 열린 무덤”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의도입니까? 팔레스틴의 무더 운 날씨에 ‘무덤이 열린 상태’라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 거기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 다. 목구멍에서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 목구멍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언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언어가 썩는 냄새가 나는 역겨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혀를 통해서 이어지는데, “속임을 일삼는다”고 했습니다. 혀로 속이는 말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마음이 ‘거짓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에는, 인간의 본성이 거짓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롬 3:12절에서,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 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치우치다”란 말이 헬라어로 ‘엑클리노’입니다. ‘에크’는 ‘밖으로’라는 뜻입니 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에크,(밖으로), ‘칼레이’(부름을 받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 ‘엑크’를 사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클리노’는 ‘떨어졌다,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엑클리노’는 ‘밖으로 떨어졌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낫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할 때의 모습을 기억해 보십시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할 때, 하나님의 시선을 의 식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다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범죄할 때도, 그 마음에서 하나님이 실종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면, 인생 이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정하면 복된 삶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주려는 최종적인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롬 3:10절에서, 바울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 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불편한 진리와 마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 진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똑같습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은 이미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인 죄의 먹 구름을 걷어낼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교회사에서 부흥의 역 사를 보면, 모두 “죄가 고백되고, 회개가 시작되면서” 일어났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진실로 죄를 미 워하고, 자기의 주인됨을 부인하고, 자기의 세속적인 모습이 미워지고 부끄러워질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정말 자기에게 부딪혀와야 합니다. 그런 뒤에, 우리는 더욱 위대한 진리와 만나야 합니다. 그 진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는가? 하나도 없었던가?”에 대한 진리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까? 그러면, 모든 인류에게 절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롬 3:21절을 보십시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로는 ‘뉘니 데’로 시작됩니 다.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뜻입니다. “But Now”입니다. 인류의 절망 앞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 다”고 했습니다. 그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서, “모든 사람으로서는 사망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100% 어둠의 존재이고, 사망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생명의 빛을 하나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을 통해서, 내 안의 더러운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의 주인됨이 얼마나 어 리석은 것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존 웨슬리는 ‘선행 은총, 선재적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결코 행위로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려고 생명의 빛을 주셨는데, 그것을 자기 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하면 다른 종교가 됩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상태 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은혜만 보이게 됩니다. 은혜 앞에서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고, 눈물만 흘립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알면 선교하게 됩니다. 복음은 나의 모습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붙잡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으로 실패했던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 전히 율법에 매여 있으면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자기는 의인인데 다른 사람은 다 죄인 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온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계란 한 판으로 요리를 하는데 푹 썩은 계란 하나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은 썩은 계란 요리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율법으로 깨끗해지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요일 4: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 로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 은혜를 붙잡고, 약속을 붙잡을 때, 의로운 자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치유받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 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책망하면서 조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어 떻게 했습니까? 막 10:48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질러 이르 되”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환난 중에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하 라고 할 때, 더욱 크게 예수님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기를 붙잡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붙잡은 것입니 다. 자기에게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절대 한계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절망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 소망의 그리스도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안 되는 것인데, 주님으로서는 다 되게 하는 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붙잡고 자기 본성을 뛰어넘게 합니다. 구주 예수님을 붙잡고 의지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면서, 연약한 본성을 뛰어넘는 초월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복된 성도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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