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상황을 몇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아기, 구유, 마리아, 약혼녀, 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 다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낮고 초라한 자리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낮고 초라한 자리에 오신 예수님이, 실제로는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목자들이 어두운 밤에 천사들의 소식을 듣고 알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이며, 여러분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롬 10: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시인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는 부활신앙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전제가 이루어지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기 죽음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통과하면, 주인이 바뀐다.
마 16: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마지막 종말의 때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메시지는 마지막 종말의 때에 보게 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땅을 살면서 맛보게 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하시려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마 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셨습니다. 그 길을 막아서려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에게 “십자가”라는 단어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가장 비극적인 “형벌”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뒤에, 앞서 말씀드린 마 16:24절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장차 보게 되거나 맛보게 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을 전제로 읽어야 합니다. 마 16:24절에서, “죽기 전에”라는 말이 헬라어로 ‘우 메 규손타이 다나투 헤오스’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번역입니다. ‘우 메’라는 말이 부정의 부정이다. 그러니까 ‘강한 긍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어야만, 반드시 죽을 때에만’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면,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반드시 죽음을 경험해야만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내 자아가 반드시 죽어야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도 내 자아가 반드시 죽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안에서 주님이 진짜 인생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과 열매를 구분하라.
존 맥아더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성공은 예수님이 주인 되어서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죄 중에 최고의 죄는 내가 주인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죄의 뿌리는 내가 주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주인으로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 진짜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괴롭히고,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죄의 본질이 아니라 죄의 행위입니다. 죄의 열매입니다. 근원적인 죄의 본질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왕이 되고, 하나님이 되서 살려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불경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싫다고 떠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의가 나타난다면, 지금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 자아가 주인 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그러면 안 되지. 미움을 끊어야지‘라고 해도 안 됩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야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라고 해야 합니다. ‘내 자아가 주인 된 상태를 부인해야지. 하나님의 나의 머리가 되고 주인이 되시게 해야지.‘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의 열매가 끊어집니다. 여러분이 빛을 향해 서 있으면 그림자가 내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빛을 등지면, 내 앞에 그림자가 있는 것입니다. 빛을 등지고 걸어갈수록 그림자는 길어집니다. 그러니까 그림자(즉, 죄의 열매)가 보이면, 빛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이 주인되시게 하라.
마리아나 목자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낮은 자리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인정했습니까? 19절을 보면,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고 했습니다. 마리는 말씀을 자기 마음에 새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레마타‘입니다. ‘로고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인데, ‘레마’라고 하면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선포된 모든 말씀을 ‘레마’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빈자리를 말씀에 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자기를 주도하게 했습니다.
목자들은 어땠습니까? 20절에서,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목자들은 듣고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찬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듣고 본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리아처럼 목자들도 자기들의 마음에 듣고 본 것을 체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실 수 있습니까? 우선은 자기 죽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어진 자리에 말씀이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주도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복잡하면 넘어 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으로 인해서 복잡해지면 안 됩니다. 세상의 논리나 자기 자아의 생각과 경험으로 인해서 복잡해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본질,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질에 딱 붙잡혀야 합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면 복잡해집니다. 주인 되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냥 순종하면서 가십시오. 그러면 승리합니다.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칭찬받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을 맞이해서 진심으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주인 되셔서 나를 붙잡고 있습니까? 내가 왕이 되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인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탄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스스로 왕 되심, 스스로 주인되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나의 세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세상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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