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5장에서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사건은 “영적인 부흥”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말씀을 들은 뒤에,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 명령을 한 마디로 바꾼다면, “성결”입니다. 성결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인 부흥을 체험하게 됩니다. 3절에서, 야곱은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 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난 영적인 부흥입니다. 곤고한 시절에 자기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가 고향을 떠나 서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갈 때, 나이가 70대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40세에 이미 결혼 을 했지만, 야곱은 이때까지 혼자였습니다. 외로움과 고독감 속에서 고향을 떠나는 때입니다. 곤고한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지금 가문의 위기 앞에서, 권력과 재산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든지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께로 영적인 방향을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의 환난 날에 응답하신 하나님, 자기가 가는 길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성결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흥을 도모하려면, “성결”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존 웨슬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결의 경험 없이 어떤 부흥도 기대하지 말라. 완전을 지향 하지 않고는 모든 신자들이 냉랭해지며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단지 경박해지며 답답해하며 험담을 지어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파기될 것이다.” 성결, 즉 세상과 구별되는 운동이 부흥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말하기를,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 의 목적은 우리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결’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는 책에서, “흔히, ‘거룩한 삶을 살려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반 대가 더욱 중요하다. 즉, 기도하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명령한 것이 이런 맥락에 의해서입니다. “거룩, 성결”을 도모한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를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고전 3: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 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로 구분했습니다. 고전 3:3절에 따르면, 육신에 속한 자들에게는 “시기와 분쟁”이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를 헬라어로 ‘사르키노이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육신의 본성에 붙잡 혀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생존 본능을 가지고, 출세와 성공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조금 더 성공하고 싶고, 조금 먹고 조금 더 놀고 조금 더 쉬고 싶은 것”입니다. “조금 더 쾌락을 즐기고, 조금 더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성”이라는 허울에 빠져서 자기의 생각과 철학을 정당화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삽니다. 하나님보다 세상 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더 주목합니다. 그게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바 울은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짐 심발라 목사님(뉴욕, 브루클린 태버네클 교회)이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성경을 계속 읽으면, 바위처럼 단단한 교리와 편견이 더 단단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믿는 것을 뒷받침할 탄약만 챙긴 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몹시 교만해져서 자기 견해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령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우리를 도우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신령한 자들”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프뉴마티코이스’라고 합니다.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 고, 자기 안에 있는 성령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자가 되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엡 5:17절과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어 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성결”을 이루려면, “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 35:4절을 보면, “그들 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 야곱이 그것들 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방 신상들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의지하던 것들입니다.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입니다. 자기가 의지하던 것, 자기가 자랑하던 것을 묻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의지하던 것, 자기가 자랑하던 것을 묻었습니다.
“벧엘”의 뜻이 ‘하나님의 집’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만 의지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을 보고 의지하고, 뭔가 신성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의지하고, 돈에 힘과 권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서 의지하면 안 된다 는 것입니다. 외모를 신성하게 여겨서 외모를 지향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 님처럼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십자가 나무” 아래에 다 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붙잡고 매달릴 대상이 “오직 십자가” 밖에 보이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때 성결이 이루어지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10:5절을 기억해 보십시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해서 높아진 것이 있으면, 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영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웨슬리가 말했듯이, 그런 성결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부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은 부흥입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은혜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삶에 문제가 있더라도,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기게 하십니다. 어떤 때는 능력을 통해서 이기게 하시고, 어떤 때는 담대함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실제적인 기적과 능력을 체험해서 이기게 하시기도 하고, 마음과 영혼이 담대하게 감당하도록 하셔서 이기게 하시기도 합니다. 5절과 6절을 주목해서 보십시요.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에게 적대자가 없었기 때문에, 무사히 벧엘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쫓으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복수하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기”때문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실제적인 체험입니다. 그 뒤를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난 주에 설명했는데, 이 약속 은 “나라”에 대한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10절은 주권에 대한 약속이고, 11절은 백성에 대한 약속, 12절 은 땅에 대한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 백성,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권, 백성, 땅”이 상징하는 것이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기둥을 세우고,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 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 마음과 영혼에 새겨지니까 담대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십시요. 야곱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야곱의 생애가 완전히 드라마틱한 성공과 부귀와 영광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갑자기 라헬의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아들을 낳다가 고생을 했습니까? 그 아들의 삶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라헬이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했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 이 담겨진 이름입니다. 자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할 인생에 대한 슬픔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아들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로 부르지 않고, “베냐민”이라고 부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쪽”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힘이 되는 아들”, 하나님 나라에 “힘이 되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부흥을 경험한 성도의 담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하셔 서, 슬픔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픔을 넘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부흥을 경험한 성도입니다.
왜 교회가 부흥을 경험해야 합니까? 왜 성도가 영적인 부흥을 체험해 야 합니까? “관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영혼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이 보이고, 영혼은 말씀을 더욱 강해지고 담대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세상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 들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귀가 달라붙어서 믿음에 도전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는 용광로와 같은 불덩이 속으로 던져지면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가나안을 정탐꾼 중에서 실패한 10명은 육적인 사실만 보았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영적인 진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누가 언약의 성취자가 되었습니까? 육 적인 생각이 아니라, 영적인 비전을 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렇게 “관”이 달라지는 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 중에도 목적 을 보고, 섭리와 경륜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난도 상처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실재적으로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것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영혼을(속사람을) 강하게 해서 이기게 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삶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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