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실절과 칠칠절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 추수기를 “칠칠절”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레 23:15절 이하를 보면,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라고 했습니다. 15절에서,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이라고 했는데, 이 날이 바로 “초실절”을 지킨 날입니다. 이때 보리 추수한 곡식단으로 “요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초실절로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내라고 해서 “칠칠절”입니다. 안식일이 7일마다 돌아오니까 7이고, 일곱 안식일을 채우라고 하니까 또 7입니다. 그래서 “칠칠절”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일곱 번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합해서 오십일을 계수하라고 했습니다. 7일이 일곱 번이니까 49일입니다. 거기에 다음날을 합하니까 50일이 됩니다. 그래서 “칠칠절”을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순”이라는 말이 열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이란 ‘오십’을 뜻합니다.
이 때가 태양력으로 5-6월에 해당하는데, 앞서 밀을 추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맥추감사주일”과 비슷한 시기입니다. 다만, 우리는 첫 열매에 감사하면서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레위기 23장 9절부터 14절까지가 초실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추수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절대로 먼저 곡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먼저 먹는다는 것은 소유권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곡식의 소유권이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난 뒤에 곡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첫 열매를 바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주신 것을 고백합니다.
두 번째 추수기인 “칠칠절”(즉, 오순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출 34:22절에서, “칠칠절”을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사실은 “밀 추수”라고 했는데, 그 때도 “첫 열매”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삑쿠레’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란 뜻입니다. 그래서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밀 추수에서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주신 것이 모두 감사
이 말씀이 지금, 출애굽 백성이 시내산에 머물 때 받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받을 때,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렸겠습니까?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들의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은 열매를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다 누구의 은혜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마음이 이미 감사입니다.
아직 열매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후에, 40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수의 절기를 지키면서, 감사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소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는 “요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는 “소제와 전제제물과 함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는 “첫 이삭의 떡과 화목제로 드린 어린 양을 요제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제사의 방식과 패턴에 신앙생활의 핵심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고운 가루가 된다는 것은 썰어지고 갈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란 곡식이 썰어지고 갈아지면서 고운 가루가 되는 것처럼, 자아가 썰어지고 갈아지는 연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란 어떤 마음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까? 자아가 살아서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완전히 죽어진 상태, 완전히 포기된 상태에서 드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모나고 거친 자기의 성품과 옛 자아가 부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갈래로 썰어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자기 안에 남겨져 있는 정욕과 교만, 이기심과 같은 마음들이 다 부서지고 죽어져야 합니다. 고통과 연단을 통과하면서, 모나고 거친 자기의 옛 성품은 다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서 사라지지 않는 감사의 마음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의 소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의 원리에 담긴 드리는 마음
“소제”의 히브리어 ‘미느하’는 본래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것도 어떤 선물이냐면, “감사, 경외, 충성”을 표현하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는 예물로 드리는 것이 소제입니다. 그때 성도가 하나님께 자기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공로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상태, 가루가 된 상태, 완전히 자아가 죽어진 상태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 그게 소제입니다. 성도란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아가 완전히 가루가 되는 것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거부하거나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죽어진 존재가 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그 소제와 그 전제제물과 함께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전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쓰코’는 ‘부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주로 포도주를 소제에 부어서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부어서 드린다는 것은 “기쁨”의 표현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기쁨으로 표현되는 것이 “부어드리는 제사, 즉 전제”입니다.
왜 자기가 포기되는 것이 기쁨입니까? 자기가 죽어지는 것이 왜 기쁨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죽어지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포기되어지는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해서 주인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은혜를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요제”의 원리입니다.
요제란 “앞뒤로 흔드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것을 취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채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부자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드리는 마음을 기뻐하시지, 드리는 크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주님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부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도 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눅 21:4절에 나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재물의 크기를 보신 것이 아니라, 드리는 마음의 크기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드리는 재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드리는 마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무엇을 드리든지, 그것을 돌려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돌려주신다고 했습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제를 “앞뒤로 흔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물을 제단 앞으로 내밀었을 때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뒤로 당겼을 때는 하나님께서 돌려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결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해서 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속죄제”의 원리에 담겨 있습니다.
농사짓는 과정, 가축을 키우는 과정에 부정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툼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농사지을 수도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은혜로 추수의 열매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추수의 열매에는 부정한 “손 떼”, 부정한 “마음의 떼”가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속죄하는 제사를 올려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추수의 제물을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이나 형제들과 갈등하고 다투었을 수도 있는데, “화목제”를 통해서 화목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결과 화목을 이룬 축복의 열매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번제”의 원리입니다. “번제”란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자기를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렇게 드릴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다시 돌려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제사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시고, 인간은 드리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받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드리는 자에게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이 매일 감사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제목처럼 “산이 높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은 산을 넘으면, 더 큰 감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주인되심,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한다면, 이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믿음으로 살고, 감사로 인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감사할 만한 일들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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