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은혜 안에 있으면 세상을 살리는 법이 된다.



성도가 은혜 안에 있으면 세상을 살리는 법이 된다.(창 26:26-33)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다. 이삭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평화의 길을 걸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찾아와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하게 된다. 이삭은 80여년 전에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브엘세바 언약을 체결했던 것처럼, 아비멜렉이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이 말씀을 들여다보면, 그 맥락이 거의 창세기 21장과 똑같다. 아브라함 당시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이삭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25절,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 예배하는 삶을 이어갔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언약 안에 머물러 있었고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방법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1. 맡김의 영역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본문에는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찾아와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9절을 보면,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이삭의 부와 세력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부와 강한 세력을 보면서도 이삭을 추방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삭이 하나님께서 복을 받는 것을 보니까 두려움이 생겼다.


이삭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게 했는가?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뢰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뢰하면서,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분인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이삭은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겨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셨다. 24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이 떨어졌을 때, 이삭이 어떻게 했나? 이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 다음으로 이삭이 행동한다. 25절,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붙잡았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신뢰하고, 말씀을 의지했다. 이것이 이삭의 맡김이었다. 성도란 이렇게 하나님께 맡김의 영역으로 과감하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2. 성도는 은혜 안에서 온전한 맡김으로 나가야 한다.


성도의 비범함이란 결국 맡기느냐 맡기지 못하느냐에서 갈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의 율법적인 자아가 강한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지 못한다.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지 못한다. 반면에 자아가 낮아지고 겸손해지면,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맡기게 된다. 자기의 노력과 열심이 주는 열매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가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성도라면, 우리의 열심이 얻어낸 열매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가 훨씬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을 다 경험한다.


시 131: 2절을 보면,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적인 말씀이 나온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여기에서 다윗은 “어머니 품에 있는 아기”라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라고 했다. 또 다윗은 자기 영혼을 “갓난 아이와 같다”고 하지 않고, “젖 뗀 아이와 같도다”고 했다.


사람들은 갓난 아이의 원형을 마음으로 품고 맡김을 고백한다. “내 힘이 다 빠졌어. 내가 완전히 바닥을 쳤어. 더 이상 갈 힘이 없어. 이제 다시 힘을 얻기 위해 돌아갈 곳은 하나님 밖에 없어.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겠어.”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런 이미지로 맡기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가 기름을 채우기 위해서 주유소로 가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자동차가 기름을 채우기 위해서 주유소로 간다. 목적이 무엇인가? 목적이 주유소인가 기름인가? 목적이 주유소가 아니라 기름이다. 이와 비슷하게, “힘이 다 빠졌으까니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다.”고 말한다면 이 말의 목적이 무엇이겠나? 하나님이 목적일까 다시 찾아야 하는 힘이 목적일까?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 힘을 찾겠다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품 자체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지는 것을 얻기 위해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것이 완전히 잘못되고 나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면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온전한 맡김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복을 얻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어떤 수단을 위해서 하나님의 품을 찾는 신자들도 역시 귀한 믿음이다. 이런 믿음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신다. 이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구원해 주시고 기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근원적인 기쁨은, 온전한 맡김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하나님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것이 기쁨이 되어서 안기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가야 한다.


3. 은혜 안에서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창 14장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었다. 높고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영광을 받으실 만한 높으신 분이었다. 그렇게 높으신 분이 창 17장에서는 “전능한 하나님”(1절)이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을 만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아브라함에게로 내려오셔서, 그에게 언약을 맺으라고 말씀하셨다.


창 21장에서는 브엘세바 우물에 에셀 나무를 심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원하신 여호와”라고 불렀다.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언제까지든지 자기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그 자체가 능력이 되고 평화가 된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렇게 언약 안에 있으니까 자기도 약속을 받았지만, 다른 이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브엘세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목마른 이스마엘이 생수를 얻었다. 죽어가던 목숨이 생명을 얻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나 있던 이방인 아비멜렉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저주 받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31절을 보면,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이방인 아비멜렉과 그의 신하들이 이삭으로 인해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방법이 이런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면 이 세상을 살리는 법이 된다.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던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보게 된다. 성도가 무슨 선한 일을 하고, 부자가 되고, 권세 잡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은혜 안에, 언약 안에, 말씀 안에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여러분이 이런 믿음의 인생을 사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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