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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세대는 사명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수 1:12-18)



출애굽 세대와 가나안 세대는 “사명”에 대한 인식이 달랐습니다.

     

출애굽 세대의 관심은 풍요로운 삶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관심이었고, 가나안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것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은 분명히 다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복된 삶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이후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왜 “가나안”이겠습니까? 가나안은 본래는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바벨탑 안에 인간의 이름을 두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 인간의 죄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언어가 흩어지 면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흩어진 죄의 싹들이 다시 모인 땅이 지중해 연안의 “가나안 땅”입니다. 흩어졌던 가나안의 후손들이 그 곳에 다시 모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을 위해서 세워놓은 땅을 상징하는 “메타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린 땅에,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한 뒤에, 언약궤를 들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워라. 거기에 살고 있는 족속들을 모두 쫓아내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깨 뜨리고 산당을 허물어라. 그 땅을 점령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냥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신학에서 “헤렘 율법”이 나오는데, 여호수아서에서는 “헤렘 율법”을 실천했다고 했습니다. “헤렘”은 ‘진멸’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씨앗 하나가 인류 전체를 오염시킨다는 것입니다. 악의 씨앗 하나가 세상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로, “함”이라는 한명으로 시작해서 “구스”와 “니므롯”이 나오고, 가나안 7족속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 하나, 짐승 하나까지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가나안 7족속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진멸”을 강조하신 것입니까? 그 족속의 이름 안에, 진멸해야 할 인간의 죄성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가나안 7족속에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낮은 땅’이란 뜻인데, 본래 ‘내려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내려간 것 이 “정욕”입니다. 사람이 고상한 모습을 나타내려고 할 때는 정욕이 억제됩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추락 하면 자기 안에 있던 “정욕”이 드러납니다. 탐욕도, 성적인 욕망까지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헷 족속”은 ‘공포와 두려움’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지 모릅니다. 건 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수많은 두려움을 끌어안고 삽니다. “아모리 족속”은 ‘산중 사람’이라는 뜻인데, ‘교만’이란 뜻도 있고, ‘교육’(지식, 학문)의 의미도 있습니 다. 그러니까 “아모리 족속”이란 ‘교육의 산’을 쌓아서 교만에 이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기르가스 족속”은 ‘진흙탕’을 뜻하는데, 이는 혼돈과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혼돈과 무질서는 창조 이 전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혼돈과 무질서였습니다. 인간이 그렇다는 것입 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는 혼돈과 무질서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방탕”입니다. 인간의 내면 에는 ‘망가져 보고 싶고, 슬픔에 머물러 있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자기의 삶이 일탈을 향하고, 방탕 으로 흐트러지려는 욕망인데, 전형적인 마귀의 계략입니다. “브리스 족속”은 ‘신경질, 미움’이란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왜 사람들이 신경질을 내고, 다른 사 람을 미워합니까? 자기의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신념이 들어와서 그것으로 누군가를 비평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부스 족속”은 ‘짓밟다, 두들겨맞다, 억울하다’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짓밟히고, 두들겨 맞 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과 증오를 끌어안고 삽니다. “히위 족속”은 ‘작은 마을, 생명이 있는 마을’이란 뜻입니다. 이름은 좋은데, 본성이 이름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야곱의 딸이었던 디나에게 욕을 보인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이 히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향락과 거짓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유혹한 전력이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히위 족속이지 않습니까?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멀리서 온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 생명을 보존합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속인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의 타락한 본성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에덴”에 ‘불순종’의 죄가 하나 들어와서, 온 세상을 죄로 물들게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만 섬기도록 창조되었는데, 마귀가 역사를 일으켜서 ‘일곱 귀신’을 조종합니다. 그것으로 인간을 사로 잡으려고 합니다.

 

     

승리하는 세대는 강하고 담대하게 사명으로 사는 세대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신앙으로 살아갈 것 같은데, 사실은 많은 사람 들이 정욕으로 삽니다. 눈이 정욕을 따라가고, 마음이 욕심을 따라 갑니다. 자아에서는 자꾸 비교와 판단이 나오고, 교만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면서 교만이 없는 것처럼 거짓과 위선을 가지고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힘들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게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됩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우리 안에 있는 일곱 귀신을 ‘헤렘하는’(즉, 진멸하는) 것”과 같 습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죄성의 이름들, 곧 “정욕, 두려움, 교만, 방탕, 신념, 원망, 거짓”들을 진멸하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나안을 거룩한 땅으로 회복하는데 쓰임받도록 하신 것이 출애굽 백성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았다고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 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 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세상을 구원할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세대는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 “사명”에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누리게 될 풍요와 번영에만 관심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땅에 들어가면, 싸워서 정복해야 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 이미 가나안에서 번영을 이루고 있는 족속과 싸울 수 있을까? 싸우면 이길 수 없을텐데.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약속의 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끝 날때까지 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전쟁이라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말입니다. 언약의 성취란 이렇게 싸워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이란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믿고 세상으로 나가서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싸워서 얻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백성이 되어 버립니다. 이단들이 판을 치고, 큰 절이 영적인 벽을 치고,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싸우려니까 만만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 영혼을 구원하는 싸움을 해야합니다. 싸우려고 나가면 여호수아의 군대처럼 승리하고, 언약을 성취하는 자가 됩니다. 다윗처럼, 어디를 가든지 이기는 자가 되고, 언약을 누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 신애교회 성도들이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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