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넘어서야 더 큰 존재가 된다.(창 37:12-28)


요셉은 17세에 꿈을 꾸었는데, 13년이라는 긴 인내의 시간을 통해 연단받았다. 성도란 하나님의 약속은 더딘 것 같아도, 하나님의 시간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루기까지 오랜 인내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의 땅으로 출발하여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나이 40세에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무려 45년만에 약속의 땅을 선물로 받았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뒤에 13년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했다.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나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때와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좋은 때는 서로 비교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일과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좋은 일들은 서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그러니까 성도란 하나님이 이루실 언약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로 승리해야 한다.

1. 부정적인 감정에 자기를 내주지 말아야 한다.

12절을 보니까 요셉의 형들이 양을 몰고 세겜으로 갔다고 했다. 세겜은 창세기 34장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노략한 곳이다. 때문에 야곱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헤브론에서 약 80km 떨어진 먼 곳까지 아들들의 안부를 알려고 요셉을 보낸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이미 심사가 많이 뒤틀려 있었다.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묘한 뉘앙스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그들은 아버지 야곱이 생각했던 것처럼 세겜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겜에 머물지 않고 도단으로 갔다. 왜 그들은 도단으로 갔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이유보다 이면에 담겨진 영적인 의미이다. 사실 관계가 어떻든지 간에, 야곱의 아들들은 지금 아버지의 생각과 다른 곳에 있다. 아버지 야곱의 뜻이나 생각과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나? 야곱의 아들들이 야곱과 틈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과도 당연히 틈이 생겨 있었다.

이 “틈”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엡 4: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틈’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토폰’인데, ‘기반, 기회’라는 뜻이다. 마귀에서 기회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눅 14장에서는 ‘자리’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말씀은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마귀에게 자리를 내주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 마귀에게 기회가 생긴다. 미움, 시기, 질투, 다툼, 갈등과 같은 감정을 가질 때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마귀는 틈을 노린다. 기회를 잡으면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서,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파고들어서는 신앙을 뒤흔들어 놓는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시기심”이라는 틈이 생기자 사탄이 이를 타고 들어왔다. 그들은 살인을 계획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었나? “시기심” 때문이다. 창 37:11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시기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좋은 것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니까 현실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실과 현실을 바라보고 조종하는 태도이다.

은혜도 적극적인 믿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체험한다. 성도에게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면 영원히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이겠지만, 이보다 더 분명하고 아름다운 진리는 없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그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날마다 새롭게 들려져야 한다. 이런 믿음으로 가지고,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마시라. 적극적인 믿음의 태로로 승리해 나가시라.

2. 시련은 성도를 기도의 사람으로 바꾸어 간다.

요셉이 팔려가는 과정을 살펴 보자. 23-24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1) 형들이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2) 그를 잡아, 3) 빈 구덩이에 던졌다고 했다. 채색 옷을 벗겼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주신 옷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소유를 빼앗겼다는 말이다. 그는 빈털털이가 되었다. 두 번째로 형들이 그를 잡았다고 했는데, 요셉의 자유를 구속했다는 뜻이다. 요셉은 자유를 빼앗겼다. 세 번째로, 그는 빈 구덩이에 던져졌다. 거기에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이 없다. 요셉이 죽음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자, 이것이 요셉의 실존이다. 그는 유력하고 사랑받던 아들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소유와 자유를 잃어버렸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상황에서 요셉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본문에서 우리는 요셉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주인공은 요셉인데, 요셉이 주도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형들에게 끌려다니고, 노예 상인들에게 끌려 다닌다. 성경에는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의 생각만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주인공 요셉의 생각은 읽을 수가 없다.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려서 꿈꾸던 시절에는 형제들을 무릎 꿇게 하는 꿈을 꾸었다. 자기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고개를 숙이니까 흥분이 되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자기의 꿈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제 사망의 구덩이에 빠지고, 타국에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형제들이 무릎 꿇는 꿈을 꾸었는데, 거꾸로 자기가 형제들에게 강제로 무릎 꿇려지게 되었다. 시작은 강제로 무릎이 꿇려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묘하지 않는가? 이때로부터 요셉이 하나님께 무릎 꿇는 인생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요셉이 꿈꾸는 사람이었을 때, 그는 자랑하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사망의 구덩이에 빠지면서 무릎 꿇는 인생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성도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랑하는 인생이 되지 마시라. 꿈을 꾸면서 존귀해질 때, 오히려 무릎 꿇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지난 주일에 설교하면서 말씀드렸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경험해 나가기 시작하면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 맡아서 하면 두렵고 떨리기 마련이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지?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준비하고 맡겨진 일을 감당한다. 그런데 몇 번 경험을 하면 익숙해지고, 익숙함이 곧 자신감으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가 중요하다. 자신감에 무엇이 담겨야 한다고 했나? 기도라고 했다. 자신감에 기도가 담겨야 끝까지 겸손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된다. 반면에 자신감에 기도가 담기지 않으면, 자신감이 무엇으로 바뀐다고 했나? 교만이라고 했다. 자신감에 기도가 담기지 않으면 교만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넘어지게 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 경험을 믿었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을 이겨본 경험을 믿으니까 기도하지 않는다. 경험이 독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성도란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 붙들려야 승리하는 것이지 자기의 경험이나 장점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정말 많은 시련을 겪게 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나?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고난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더 큰 영광으로 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시련도 고난도 허락하시는 것이다.

3. 시련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보게 하신다.

몸이 팔려가더라도 마음이 무너지면 안 된다. “상황이 안 좋으면 일이 안 된다, 환경이 나쁘면 일이 안 된다.”고 하는 논리에 속지 말라.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관점과 계획에 관심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며, 평생을 두고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이 있을 때 일이 더 잘되고 열심히 하게 될 때가 있다. 고난이 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을 내고 열심히 뛰는 사람이 있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험이 오면 낙심하고, 고난이 오면 두려워한다. 그러나 신앙하는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신뢰한다.

고난이 우리를 더 힘 있게 할 때가 있다. 작은 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이 불수록 더 커지고 강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고난이나 시련 때문에 아파할 수는 있어도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육체에 가시를 품고 살았다. 질병이라는 가시, 고통이라는 가시를 품고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해결해 주세요” 그것도 세 번이나 기도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주셨던가? 하나님은 오히려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 육체의 가시, 그 연약함을 자랑해라” 이렇게 하시지 않았던가?

여러분도 비슷한 체험이 있으실 것이다.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셨던 때를 기억해 보시라. 하나님이 신속하게 처리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나? 아니면 그 문제를 오랜 동안 끌어안고 기도하게 하시는 경우가 많았나? 후자가 아니었던가? 내게는 그런 경우가 더 많았다. 죄송하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라. 나를 괴롭게 하는 고통의 상황이나 괴로움의 조건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고통의 조건들을 수용하게 하신다. 그것을 끌어안게 하시고, 결국에는 그것을 이겨내게 하신다.

그렇게 여러분 안에 있던 문제들을 이겨내고 나면 무엇이 남게 되던가? “간증”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성도를 다스려 나가시는 것이다. 고통을 수용하게 하시고, 그것을 이겨내게 하시고, 결국에는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그렇게 힘을 가진 존재로 세워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의 상황들을 그냥 사라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고통의 상황들 속에서 그것들을 이겨내는 사람으로 세워 가신다. 고통의 상황과 조건들을 수용하고, 살아내고, 이겨내게 하신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 주인공으로 삼아가시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이긴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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