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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고정하라, 흔들리지 마라, 기도로 승리하라(출 40:34-38).

최종 수정일: 6월 19일


[성전꽃예술 해설: 예수님께 드리는 하트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세 번째 달이 되던 날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1년을 시내산 자락에서 지낸 것입니다. 이곳에서 “아세 레트 핫데바림”을 받았고,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출 40:17절을 보면, “출애굽 둘째 해 첫째 달 초 하루”(즉, 출애굽 2년 1월 1일)에 성막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성막을 세우고 성막 봉헌을 했다는 것입 니다. 그렇게 성막 봉헌식을 마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했다”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는데 모세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영광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부흥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 광에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36절과 37절을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 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서 갔다는 것입니다. 구름이 성막에 덮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이 구름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하고, 떠오 르지 않으면 행진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민 9:21절 이하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다”고 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시는 인생을 배워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착각 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른 것 같아도, 하나님 없이 가는 인생은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님 없이 사는 인생 자체가 비극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려고, 40년이나 광야에서 연단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항상 말씀이 중심입니다. 말씀의 실제인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영을 이룰 때, 성막이 중심에 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세 개의 지파가 진영을 이루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바라보면, 무슨 모양이 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 모양이라 고 했습니다. 십자가 형태의 진영이 광야에서 깨지지 않습니다. 가나안을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십자 가 진영을 이루고 머뭅니다. 십자가 진영에서 바라보는 곳이 항상 언약궤가 있는 성막입니다. 진영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성막입니다. 왜 입니까?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하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 대로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라보는 곳이 항상 “언약궤가 있는 성막, 말씀이 있는 성막”입니다. 십자가의 중심을 바라보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말씀의 중심을 붙잡고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신 8:2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하신 동기가 “너를 낮추시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낮아진 상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교만했다는 뜻입니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목이 곧은 백 성”(출 33: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마땅한데,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 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께로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아지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에 의지해서 사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 8:3절에서, 모세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붙잡고 살라는 것이 핵심인 것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인생의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도전에는 하나님이 항상 그 중심에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머무는 곳에서 성막은 항상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속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인생을 도전하는 그들이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과연 그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합니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진영의 중심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성막 입니다. 말씀의 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 시선이 흔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행진을 할 때는 법궤를 보고 따라갑니다. 성막 위의 구름을 보고 따라갑니다. 환경을 보거나 뒤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38절을 보십시요.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행진하는 길에서 무엇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황무지를 보고, 대적들을 보고, 마른 하늘과 땅을 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고 살면 축복입니다. 하나님 의 말씀을 듣고 살면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되려면 전제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과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출 40장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막을 세우고 봉헌하 는 과정에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는 말씀을 반복적으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이 표현이 무려 8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실패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대신에 자기들을 위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보고, 아세레트 핫데바림이 세겨진 돌비를 던져서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롭게 두 돌비를 준비하라고 하셨고, 거기에 다시 말씀을 새겨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붙잡고 살아야 할 말씀을 새겨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을 전한대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된 상태로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 과 기도로 하나된 마음을 가지고 성전에 있어야 합니다. 찬송하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 예배하는 자리, 말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어제 호렙산기도회 마지막 날인데, 많은 성도들이 함께 했습니다. 각자 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서 섬기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성가대는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연습하고, 여선교회는 아침 애찬을 준비하려고 이른 새벽부터 나오고, 텐트를 치고 테이블과 의자를 놓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수고들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수고를 하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펴서 출 4:29 절을 보십시요.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잘 보십시요. 성막을 세우고, 성전 기구들을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번제와 소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번제는 다 태워서 드 리는 제사입니다. 헌신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소제”의 히브리어 ‘미느하’는 본래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것도 어떤 선물이냐면, “감사, 경외, 충 성”을 표현하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는 예물로 드리는 것이 소제입니다. 그때 성도가 하나님께 자기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 기의 공로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상태, 가루가 된 상태, 완전히 자아가 죽어진 상태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 그게 소제입니다. 지금 소제를 드리는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내산에서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무엇을 먹었습니까?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면 소제의 재료가 무엇이겠습니까? 곡식이 “만나”밖에 없습니다. 하나 님이 주신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와 충성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성막을 짓는라고 자기들의 소유를 봉헌했습니다. 수많은 금을 바치고, 옷감을 바치고, 재료를 바쳤습니다. 그것으로 수고하고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짜증을 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까? 내게 소득이 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익이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까워하고 그렇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자기의 것을 드리고, 자기의 힘과 정성을 다해서”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 리고 거기에 무엇을 더하고 있습니까? “번제와 소제”입니다. 헌신과 감사를 더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헌신과 감사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의 마음과 은혜에 화담하는 감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 나님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3절과 34절입니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이것을 사도행전 2장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 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절)고 했습니다. 시선을 주님께로 두고, 제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 엇보다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어로 ‘호모투마돈’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합 해서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 기도로 마음이 하나된 그 순간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리에게도 그런 일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시선을 주님에게로 두십시요. 마음이 흔 들리지 말고, 말씀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시요.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승리하는 세대 가 되십시요. 우리가 날마다 그렇게 성장해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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