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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피할 수 없지만, 넘지 못할 산도 아니다.(눅 18;1-8)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강청해서 기도하면 응답받을 것이다”라고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믿으셔야 합니다. 3절에서 과부가 청원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3절에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공의”에 대한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불의하고 억울한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순종하면서 불의한 핍박과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공의”에 의심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불의한 일을 만납니다. 억울한 사건을 만나고, 원하지 않던 질병에 걸립니다. 뜻하지 않은 박해를 당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시련을 당합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우신 분일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현실, 고통스러운 일들이 내게 찾아온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해 지면서, 기도 응답에 대한 회의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의심과 회의가 일어나면, 마침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장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과부의 억울함을 무시한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불합리나 부조리,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나 고난 앞에서, “여전히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믿으라.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앞에 펼쳐진 무거운 현실 앞에서, “내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내가 기도했는데, 내가 의지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공의롭지 못하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더디 보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때 그만한 믿음을 보겠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국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현실의 불합리를 보면서, 부조리를 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시련과 환난을 보면서 믿음을 포기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란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전하시려고 했던 메시지입니다. “너희 눈에 불의해 보이는 현실, 불합리해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택하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때로는 응답이 더디게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이런 메시지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장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전혀 다른 분이라는 것입니다. 과부의 간청을 무시하던 불의한 재판장, 자기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억지로 응답하는 불의한 재판장과는 완전히 다른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자녀들의 기도에 마침내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믿어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심하라.


이런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응답의 열매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우선적으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에 주목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응답받을 열매에 관심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 자체에 관심하시지 않습니다. “응답”이라는 선물, 그것은 정말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아닙니까? 은혜입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응답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신뢰받는 아버지가 되시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에게, 손주들에게 선물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선물” 자체가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친밀감”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남녀가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친밀감, 애정관계”를 더 돈돈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떤 때는 그냥 선물을 주고 싶어서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 기대하는 것은 “물질적인 만족”이 아닙니다. “관계성”의 친밀함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 되었다는 그렇게 놀라운 권세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시간을 기쁨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고통과 인내로 보내든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발견하고 경험하는 시간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경험을 하면, 담대함이 생깁니다. 어떤 응답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경험이 확실하면, 주시는 것도 감사고 주시지 않는 것도 감사가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실패는 피할 수 없지만, 넘지못할 산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실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라면, 어떤 실패라도 넘지 못할 산이 아닙니다. 다 이겨내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원하는 뜻과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목적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믿음”입니다.

히 10: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담대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로 ‘파르레시안’은 본래 ‘확신’이란 뜻입니다. 히 10:19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담력”이 ‘파르레시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서 성소로 들어갈 “확신”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 10:35절이 말씀하는 바는 “너희 확신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어떤 순간이든지 믿음으로 잘 이겨내야 합니다. 특히 환난당할 때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라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또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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