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네 번째 말씀을 다루면서, 안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오늘은 “거룩하게 하라”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려고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이중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으로서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은 출 20:11절 말씀에 근거한다.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둘째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인데, 신 5:15절 말씀에 근거한다.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런 이중적인 이유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해서 그 복을 받아 누려야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을 올려드리라는 것이다.
이런 “구속 사역의 완성”이라는 안식일 개념이 확장되면서 신약시대의 주일로 발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에서 최종적인 완성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곧 주일로 안식일이 승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이 거룩함, 거룩성에 대한 말씀이 오늘의 주제이다.
1. 왜 거룩하게 해야 하는가?
출 20: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하셨는데, 일곱째 날이 되면 어김없이 쉬어야 했다. 출 23:12절에서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고 하셨다. 말씀은 이어서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12절)고 한다. 안식일에는 짐승들과 종들과 나그네들까지도 안식을 취하도록 하셨다.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가축들이나 종들은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언제나 여러 가지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나그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천시받고 학대받던 사람도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 백성과 똑같은 안식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안식이 하나님 안에서는 주어졌다는 말씀이다.
출 34:21절에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는 안식일 규례가 나온다. 특이한 것은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출 34:21)는 명령이다. 팔레스틴 지방은 우기와 건기가 비교적 뚜렷해서, 이 시기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안식일이 되면 쉬라는 것이다. 이것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이겠나? “밭 갈 떼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는 것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이 날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출 35:3절에서는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고 했다. 생활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노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켜내는 것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안식일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말도 없다. “거룩”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되다, 성별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 싶으셔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거룩이다. 왜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나?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거룩”이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고 싶으시다는 소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레 11:45절을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한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한다. 그래서 고난에서 구원하시고,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고, 사랑과 은혜로 인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2. 그러면 어떻게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의 옷을 입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할 때, 헬라어로 ‘네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네오스는 연대기적으로 따져서 새로운 것을 말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되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새로워지는 것을 ‘네오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카이노스’라고 하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 될 때 사용한다.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표현할 때, ‘카이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콩을 볶아서 콩자반을 만들면 ‘네오스’이다. 그런데 콩을 찌고, 갈고, 뭉치고, 발효시켜서 된장으로 만들면 ‘카이노스’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새로움을 말할 때 ‘카이노스’를 사용한다. 고후 5: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다.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말이 ‘카이노스’이다.
엡 4장에서도 “새 사람”이라고 할 때, ‘카이노스’를 사용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재로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삼아 주셨는가? 요 3:3절을 보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나온다. 그 말씀이 다음과 같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삼아주셨다.
여기서 “거듭나다”는 말이 헬라어 ‘겐네떼 아노뗀’으로 쓰였다. ‘아노뗀’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다시’라는 뜻도 있고, ‘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뜻도 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셨던 인간의 본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 그 본원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아노뗀’은 다른 의미에서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거듭나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은혜가 임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은 수동태로 쓰였기 때문에, 거듭난다는 것이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뜻한다.
이렇게 거듭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처럼, 거룩이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면, 거룩에 도달할 수가 없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거룩에 도달할 수 있다. 자기의 이성과 열심으로 거룩에 도달하려고 해도 안 된다.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인가?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거룩은 인격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거룩은 아니다. 거룩에 도달하면 고상한 인격이 되겠지만, 고상한 인격을 가졌다고 거룩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누구든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속 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 옷도 내주라,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해 주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세리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는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도 말씀하셨다.
여러분, 이런 것이 거룩이다. 이것을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 “아니요, 목사님, 저는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이 있다면 거기에 이 말씀을 더해 보겠다. “그렇게 하면서도 항상 기쁨을 잃지 마십시요. 항상 감사하십시요.” 그렇게 하실 수 있겠나? 그렇게 나가는 것이 거룩이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마음이다. 살전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런 거룩에 도달하는 것이 성령의 임재와 충만하심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거룩에 도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3. 어떻게 성령충만한 성도가 될 수 있겠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은 “거룩”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신비로운 부분이 있다. 하나님께서 공간이나 사물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거룩하게 하셨다. 또 성도들도 하여금 “안식일”이라는 시간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나?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잊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시간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히브리 신학자 아브라함 죠슈아 헤셀은 “안식일”을 ‘시간 속의 지성소’라고 표현했다. 지성소가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는 장소이니까,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옳은 것이다. 오늘날 이런 신앙이 많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말한다. 한국 교회가 옛날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은 말처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신앙생활도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지 않고, 안식일을 세속적인 날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안 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처럼 양심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 영혼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 자기 입에서 더러운 것이 나가지 않도록 마스크를 쓴 것처럼, 양심에서 더러운 것이 나가지 않도록 마스크를 써야 한다. 몸에 더러운 것이 오염되지 않도록 마스크를 쓴 것처럼 자기 영혼에 더러운 것이 오염되지 않도록 ‘마스크’를 써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평소에 자기의 마음과 양심에 ‘마스크’를 쓰고 살았다면, 그래서 자기의 가족과 이웃에게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육신에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비난당하게 될까? 여러분이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손을 씻었던 것처럼, 마음도 양심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주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웠다. 그리고 더 많이 회개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했더라면, 내가 더 많이 희생했더라면, 내가 더 많이 기뻐했더라면, 내가 더 많은 덕을 세웠더라면, 내가 더 많이 섬기고 봉사했더라면...”
여러분도 저와 같은 영적인 도전과 고민을 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답은 결국 성령님께 자기를 내어드리는 것으로 결론이 나야 한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기의 지식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성령님께 내려놓아야 한다. 성령님이 나를 이끄시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이 출발이 “주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주일에, 한 주간의 첫째 날에 온전히 나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예배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라.” 이 날을 성령의 충만하심에 사로잡히는 “첫째 날로 삼으시라.” 그래서 여러분의 생애가 진심으로 은혜와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는 복되고 신령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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