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3_데칼로그, 생명의 길이 시작되었다.3 (출 19:1-6)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이요 자녀로 성장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성도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세레트 핫데바림을 주신 이유와 목적도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세레트 핫데바림’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아세레트 핫데바림을 잘 지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출 19:5-6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잘 듣고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아세레트 핫데바림을 지켜야 하겠나?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을 받은 성도가 어떻게 말씀을 대해야 하는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은혜를 나누고, 기도의 제목을 삼으려고 한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보고, 믿어야 한다.


말씀이 들려올 때,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출 19:5절에서 “너희가... 잘 듣고”라고 할 때, 히브리어 ‘솨모아 티쉬메우’라고 표현했는데 “너희가 반드시 듣고”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듣는다는 뜻이 아니다.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데까지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듣는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마”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 ‘샤마’에서 순종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말씀을 잘 들으면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셨다. 인간이란 교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교만이라는 뜻의 헬라어 ‘주드’가 ‘요리한다’는 뜻의 단어 ‘제드’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뜻이다.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가? 내 자아를 만족시켜줄 맛있는 음식같은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이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말씀은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간의 영적인 교만과 무지의 상태라고 하신 것이다. 성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고, 그것이 바로 ‘샤마’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잘 들으면, 믿고 순종하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출 19:9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에 임재하시는 것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셨다. 보고 듣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믿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듣고 믿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진다. 환난이나 문제에 직면해서 거기에 빠져들어 가면 부정적인 생각과 원망이 늘게 되어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추격해온 바로의 군대가 가까이 올 때에 눈을 들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보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권세를 보았고, 죽음의 위협을 보았다. 그러니까 원망이 들어오고 불평하는 마음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모세는 정반대의 것을 보았다. 출 14:1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소망을 보았다. 성도는 이런 것을 보아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신자가 눈을 들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세속적인 권세나 영광이 아니다. 성도는 언제나 눈을 들어서 여호와의 영광과 권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2. 형식적인 믿음에서 영적인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인간의 한계란 율법을 계명으로 보고 그것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도 그랬다. 막 10:17절 말씀을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나? 예수님께서 아세레트 핫데바림, 곧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지키라고 하셨다. 막 10:19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게 그에게 딜레마가 되었다.


사실 이 사람은 계명이나 율법, 그리고 십계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율법적으로 행하고 지켰다. 그래서 그는 이미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한다. 막 10:20절,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여기서 “내가...지켰나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에퓔락사멘’은 ‘퓔락소’의 중간태이다.


‘퓔락소’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단어가 중간태로 표현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어떤 행위의 주체가 주어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주어인 “나를 위해서” 지켰다는 뜻이다. 부자 청년은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도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율법적인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혹은 자기의 체면을 위해서 율법을 행위로만 지켜낸 것이다.


성서 원문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청년의 대화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을 “지키라”는 말과 부자 청년이 계명을 “지켰다”고 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키라”는 말은 헬라어로 ‘테로스’인데, 내면에 의미를 담고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부자 청년이 “지켰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퓔락소’라는 단어인데, 바깥으로 드러내서 행위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을 뒤엎으시는 이야기이다.


말씀을 따라가는데, 바깥 행위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구원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율법주의에 불과하다. 내면에 기뻐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출 19:5절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했다. 여기서 “지키면”이라는 말이 헬라어 ‘테로스’에 해당한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마음에 기쁨으로 간직하라는 뜻이다. 드러나는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마음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진정한 신앙이란 “형식주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진심으로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고, 진심으로 말씀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본심이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기뻐하고, 가장 신뢰하고, 가장 의지해야 한다.


3. 믿음에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한다.


앞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은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퓔락소’로 대답해 버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데 진정한 기쁨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청년은 그런 마음 상태보다는 그저 종교적인 행위로 지켰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청년에게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재물이 많아서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했다.


왜 그는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갔을까? 여전히 자기 소유를 고집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혀 주신다. 막 10: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고 하셨다.


킹제임스 버전 성경의 원문이 되는 헬라어 성서를 ‘표준 원문’(Textus Receptus)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막 10:24절에 헬라어로 ‘투스 페포이도타스 에피 토이스 크레마신’이라는 문장이 쓰여져 있다. 이 말을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Them that trust in riches”로 번역했다. 우리 말로는 ‘부를 신뢰하는 사람들, 재산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부를 신뢰하는 사람, 부를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마음이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소유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그것을 자랑하고 신뢰하고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그의 말이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까워서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차이이다. 돈이 많아야 헌금을 하던가? 아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사랑하는 차이이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믿지 못하면 선교사로 나가는 성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는 말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아까울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께 마음을 드리고 삶을 드리는 사람에게 영생의 길만이 아니라 축복의 길도 열리는 것이다. 마음이 드려지고, 그것이 삶으로 드러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 때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말씀이 진짜 구원과 사랑의 위대한 말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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