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삶의 원칙이 되게 하라



십자가가 삶의 원칙이 되게 하라(창 34:1-12)


오늘 본문은 창세기를 읽어나갈 때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어떤 주석학자는 창 34장이 성경 중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강간, 분노, 속임, 탐욕, 살인, 폭력 그리고 자기 중심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하기가 까다롭다. 본문은 디나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살인과 약탈 사건까지 확대된다.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세겜은 아버지를 동원해 디나와의 결혼을 제의한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요구한다. 그리고는 할례의 고통이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진 제 3일에 세겜 부족을 기습 공격한다. 그래서 부족의 모든 남자들을 몰살해버린다. 세겜 한 사람에 대한 복수를 그 성의 모든 남자들에게 갚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려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야 한다.


1. 세상에 붙잡히지 말고 하나님께 붙잡혀야 한다.


본문에서 전하는 비극은 이미 창 31장에서 그 전조를 보였다. 야곱은 약속의 땅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들로 인해 두 번의 시련을 겪게 된다. 한번은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가지고 오면서 시작되었다. 라반은 야곱을 추격해서 핍박하는데, 그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가 ‘자신의 드라빔’이었다.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은 야곱의 가정에 우상을 들여 놓으려고 했다. 그것이 위기의 시작이다. 두번째 위기는 그가 사랑했던 또 다른 여인, 레아로부터 얻은 딸 디나로 인해서이다.


1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라고 할 때 ‘보다’라는 단어가 ‘라아’이다. 디나가 세겜의 딸들을 ‘라아’하러 갔다. 여기서 ‘라아’라는 단어는 단순히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 뒤에 전치사로 ‘빼’라는 단어가 따라 붙었는데, 이 경우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다, 배우다, 즐기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니까 지금 디나가 세겜의 딸들을 어떻게 보고 있다는 뜻인가? 그냥 호기심으로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디나는 이방인들의 타락한 풍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함께 즐기려는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디나는 이방인들의 풍속과 어울려서 즐기며, 그들과 섞여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절에 보니까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인 추장 세겜도 디나를 ‘라아’하고 있다. 아주 의도적으로 ‘라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라아’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다. 디나가 세상과 어울려서 세상을 즐기려고 하니까 어떻게 되었나? 그 땅의 추장 세겜도 디나를 ‘라아’ 하더라는 것이다.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혈안이 된 세겜의 눈에 딱 맞는 욕망의 먹이감으로 보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2절,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세겜이 강제로 그녀를 욕되게 했다. 디나는 이방사람들의 세상에 섞여 들어갔는데, 거기서 세상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라헬은 아버지의 우상에 흔들렸고, 디나는 이방 사람들의 세상에 흔들렸다. 이것이 본문이 주려는 우선적인 교훈이다. 성도는 우상에 흔들리면 안 되고, 세상에 유혹당하면 안 된다. 세겜이 디나를 욕보이고 나서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가서 하는 말이 무엇이었나? 9-10절,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통혼을 하자고 한다. 그리고는 22절에 가서는 자기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한 민족이 되자고 한다. 섞이자는 것이다. 창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이 섞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섞이면 어떻게 되나? 하나님의 백성이고, 신앙이고, 정체성이고 하는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성도가 세상과 섞이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에서 욕을 보게 되고, 세상에 길들여지게 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된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을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에, 성도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앙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구원도 잃어버리게 된다.


2. 그리스도인은 성도로 부름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이스’의 원형이 ‘하기오스’인데, 이 말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사물에 쓰이면 ‘하나님께 봉헌된, 완전한, 하나님께 합당한’이란 뜻이 된다. 이 단어가 사람이나 인격에 쓰이면 ‘하나님께 헌신한’이란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 봉헌된 물건이 ‘거룩한 것’이란 의미의 ‘하기오스’로 불렸다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호이 하기오이, 즉 성도’라고 불렸다.

그러니까 성도란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 혹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냥 단순하게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되는 것, 즉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의 우선적인 조건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우선적인 조건은 ‘온전함이고 완전함’이다.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흠이 없는 온전한 것”들이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온전하고 흠이 없는 제물이 되는가? ‘완전하게 죽어진 것’이 온전하고 흠이 없는 제물이 된다. 레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의 내용들을 보면 모두 부서지고 잘려지는 이야기들이다. 번제를 드릴 때 짐승의 각을 뜨고, 잘라내고, 내장을 분리해야 한다. 온통 해체를 이야기한다. 소제를 드릴 때도 곡식을 그냥 드리지 말고, 곱게 빻아서 드리라고 했다. 잘려지고, 부서지고, 빻아진 것들만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성도로 부름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진 상태, 납작하게 엎드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비로소 능력이 되는 것이다.


3. 자아를 건드려도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게 복수할 때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언약과 신실하심의 징표로 주신 할례를 자신들의 복수심을 갚는데 이용했다. 그들은 디나가 더럽힘을 당한 것에만 집착할 뿐, 그것을 되갚기 위해 자신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더럽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일에 대해서 야곱이 레위와 시므온을 책망한다. 30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여기서 “화를 끼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카르템’인데, ‘괴롭히다, 불편하게 하다’란 뜻이다. 야곱이 이렇게 레위와 시므온의 자아를 건드린까, 아들들이 야곱에게 발끈하면서 대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셀프 라이처스’(자기 의)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아를 건드리면 가만히 참지를 못한다. 살인 사건이 왜 일어나겠나? 상대의 자아를 건드리니까 그렇다.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대방의 ‘자아’를 건드리니까 그렇게 다툼이 일어난다. 분노도 마찬가지다. 왜 분노하나? 자기의 자아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는데, 그런 자기의 자아를 건드리니까 분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러분은 염려를 하시나 안 하시나? 한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내 판단과 경험으로 보니까 안 될 것 같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지 아시나? 내가 싫은 것이다. 내 자아가 거부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비방하는 것이다. 염려도, 분노도, 비방도 모두 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아’가 하는 짓이다.


여러분, 우리의 죄는 무엇으로 정결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아담의 자아가 어떻게 죽어지는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피와 연결된 구절이 없다. 우리의 자아는 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해결이 되는가? 십자가로 밖에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아는 죽음으로 밖에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자아가 죽어야만 자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다. 죄는 보혈로 씻어지는 것인데, 자아는 죽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아가 십자가에서 해결이 되어야 한다. 내 안의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예수님이 주인이 되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으로 바뀌게 되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된다. 주님이 내 안에 주인이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인이 바뀌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이 바꾸시는 것이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된다.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절망이었다.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엘리야의 이야기를 듣고 자아를 버렸더니 절망이 소망이 되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병으로 괴로운 신세였다. 그런데 자아를 버렸더니 괴로움이 기쁨으로, 고난이 소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내 안의 주인이 바뀌면 절망이 소망이 되고, 아픔과 상처가 기쁨과 감사로 바뀌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 날마다 풍성하게 체험되는 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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