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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사랑이 내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롬 5:1-11)


[성전 꽃예술 해설: 날마다 기도로 시작하고 감사로 마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소서. ]

 

롬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런데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진 것처럼, 여러분도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 다는 것입니다. 롬 4:23-24절에서,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의 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 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핵심입니다. 그것을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관계에서 핵심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하나만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히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믿음”만 보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담이 타락할 때 “믿음”이 훼손되었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훼손된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을 때, 그의 육체가 훼손된 것이 아닙니다. 몸에 암이 생기거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입술이 찢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지켜야 하는 제사장의 믿음이 훼손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자기가 청지기라는 믿음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이후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가인”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살해하는 자가 되어서, 자기 뜻대로 사는 자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자기 애’가 강하고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자기 힘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자기 노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교만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려면,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믿음”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할 때,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종의 믿음”(즉, 청지기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빌 2:6-8절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롬 5:12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는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롬 5:19절을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 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 서 범죄한 아담을 따라서 가인의 길을 걸으면 사망의 존재인데, 예수님의 길을 걸으면 생명의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회복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이 “종의 믿음”(에덴의 믿음)을 온전히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보 증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증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것 입니다. 이 말씀이 롬 5:1절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게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영혼이 되었을 때, 자기의 죄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무화과 잎을 엮어서 자기를 가리려고 했지만, 가릴 수 없었습니다. 그 상태로는 하나님과 마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 부터 숨었습니다. 창 3:7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절) 여기서 “치마”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하고르’인데, 본래는 “띠”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의 허물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띠를 둘렀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띠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자기 의를 상 징합니다. 자기가 만들어서 가리고, 하나님 앞에 가림막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하나 님 앞에 자기를 세우는 데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율법 아래 정죄받게 된 인간이 죄와 수치를 가리기 위 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짐승을 희생제물로 삼아서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 다. ‘옷’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테노트’라고 하는데, 목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옷입니다. 쉽게 말하면, ‘긴 코트’를 생각하면 됩니다. 인간의 허물을 가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인간 이 ‘자기 의, 공로, 노력’으로 가리지 못하던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가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보혈을 보십니다. 예수님의 피값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저와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롬 5:3절과 4절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카우코메다’를 썼는데,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자랑하다’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환난을 당해도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환난을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환난을 주목하면 안 됩니다. 환난이 무엇을 이루는 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롬 5:3절과 4절을 자세히 보십시요. 환난이 무엇을 이룹니까?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 집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누가 이루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시스’가 ‘들리보’에서 나왔는데, ‘짜내다, 분쇄하다’란 뜻입니다. 콩에서 기름을 짜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어떻게 됩니까? 원형이 없어집니다. 분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 다. 분쇄하면 원형이 다 없어집니다. 헬라어 ‘들리보’가 ‘트리보’와 어근이 같은데, ‘트리보’는 ‘무엇인가 를 막 문질러서 원형이 닳아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닳아서 없어질 때가 있 는데, 그런 것을 ‘트리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들리보’나 ‘트리보’나 원형이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이 다. 결국 “환난”이라는 말을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닳아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아름다움, 나의 젊음, 나의 이상, 나의 꿈” 이런 것들이 원형이 있는데, 세상과 부딪혀서 닳아 없 어집니다. 염려할 만한 상황, 두려워할 만한 일들, 슬픔과 좌절의 사건들에 닳아서 없어집니다. 이런 게 환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원형이 닳아서 없어질 때, 우리는 동시에 ‘자기의 자아’도 닳아서 없어 지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 환난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에 그들이 광야로 갑니다. 그들에게는 광야가 ‘들립시스’입니다. 광야 에서 자기의 원형이 닳아지도록 연단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닳아 없어지도록 연단받으면서, 자기 자아가 닳아서 없어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환난이 소망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환난과 소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환난’을 지나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 있습니까? 지금 지나는 “시련과 역경”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반드시 소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환난을 통과하면서, “자아”가 닳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환난이 내 삶의 원형을 소멸시켜나갈 때, 나의 자아가 닳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아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이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누가 이루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나로서는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면서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환난이나 시련이나 아픔이 있어도, 주 예수님이 소망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탄자니아의 어느 선교사가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아프리카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녀가 아침 인사를 건네자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자매님, 오늘 아침에도 주님을 찬양하셨습니까?” 그녀는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뇨, 오늘 아침엔 너무 화나는 일이 있어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그러자 목사님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 가 오늘 아침에는 그 효력을 잃어버렸나요?” 나는 이와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생의 여러가지 피곤한 일들 때문에 혹시 “십자가의 사랑이 당신에게서 효력을 상실했는가?” 그럴리가 없습니다. 분노가 있든지, 슬픔이나 낙심이 있든지, 두려움이 있든지! 무엇으로도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흔들리 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내 자아가 죽는 것, 내 욕망이 죽는 것, 내 자랑이 죽는 것, 내 노력과 내 의지가 죽는 것, 거기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손해를 당하고, 미움을 받아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연약해지고, 물질로 인해 서 곤란을 당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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