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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사랑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롬 5:1-11)


[성전꽃예술 해설: 풍성한 추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가족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헨리 블랙가비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에 반응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의기소침해지고, 죄책감을 느끼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 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주시려고 한다는 기대를 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의기소침해지고, 죄책감과 좌절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더 크신 하나님에 대해서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롬 5:3-4절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인내 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소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피스’는 ‘확실 한 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소망”(엘피스)은 근거없는 희망 이 아닙니다. 말씀에 근거된 “확실한 약속”입니다.


롬 5:3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했을 때, “즐거워한다”는 말이 헬라어로 ‘카우코 메다’라고 했습니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란 뜻도 있고, ‘자랑하다’란 뜻도 있습니다. 성도는 환난 중 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환난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환난을 자랑한 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환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환난을 견뎌내라고 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난과 직면했을 때, 그것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인내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바울은 “환난 중에도 참고 견디느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 다”고 말했습니다. 성도의 믿음이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환난을 자랑하고, 환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환난이 무엇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까? “소망”입니다. 환난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 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환난이 소망을 이룬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들어온 시련, 역경, 질병, 눈물, 아픔, 괴로움이 “소망을 이룬다”고 믿습니까? 믿으셔 합니다. “아멘”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포천에 있는 교회 집회를 인도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아멘”으로 뜨겁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받은 교회였던 이유가 무 엇입니까? “아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멘이 없으니까 충성이 없습니다. 반대로 충성이 없으니까 아 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교회(형식만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충성이 나옵니다. 그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 옛날 어른들이 밥을 “복스럽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말씀도 “복스럽게 먹어야” 합 니다. 복스럽게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적극적으로 받아 먹고, 아멘으로 화답하라는 것입니다.(음 식을 맛있게 먹고, “맛있다, 맛있다”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벧전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 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엄청난 박해를 당할 때 쓰여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면 박해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만 해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현실에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증 거기가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런 “환난의 시대”에 베드로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결국에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계 7:13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느냐?”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 요 한이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계 7:14)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답이 들려오는데,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계 7:14절을 보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요. 주님은 “큰 환란을 피한 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큰 환난을 통과한 뒤에, 구원 받은 자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박해와 수치를 통과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란 환난과 시련이 들어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 4:12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 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퓌로세이’는 ‘불에 태워지는, 연소되는’ 그런 시험을 말합니다. 그런 시 험을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필립얀시도 [기도]라는 책에서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노릇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만, 환난이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낙심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이 무엇을 이루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환난이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구하는 모든 것을 채우시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어지러울 것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과 저 사람이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구하는 것을 채우신다면 세상의 질서가 다 깨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하는 모든 것을 채우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이 구하는 것을 채워주시지 않아서 섭섭하고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나온 세 월을 생각해 보십시요. 뭔가 부족하고, 뭔가 힘들고, 뭔가 괴롭고 그랬지만, 지나온 세월을 믿음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믿음으로 그렇게 해 보십시요. 그러면 어떻게 고백이 됩니까? “하나님이 나의 쓸 것을 채우셨다”고 고백되지 않습니까? 이게 믿음입니다.


약 1:6-7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 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서 오해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한 대로 응답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신 대로 응답이 올거라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하는 대로 다 응답을 받았습니까? 혹은 받고 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마 7장에서 예수 님은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신실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이 소망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원형이 닳아서 없어질 때, 동시에 “나의 자아”도 닳아서 없어지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 환난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에 그들이 광야로 갑니다. 그들에게는 광야가 ‘들립시스’입니다. 광야에서 자기의 원형이 닳아지도록 연단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닳아 없어지도록 연단받으면서, 자기 자아가 닳아서 없어지게 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니까 환난이 소망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환난 당할 때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네’는 ‘~ 아래에 머무르면서 버틴다’는 뜻의 ‘휘포메노‘에서 유래했습니다. 인내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소망을 바 라보면서 버티는 것입니다. 맞서서 싸울 힘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대항하고 이기는 정신이 ‘휘포모네’입니다. 성도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유혹하고, 핍박하고,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딤후 2:12절에서,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 이라”고 했습니다. “참아야” 한다는 말을 할 때, ‘휘포메노멘’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헬라어로 현재형입 니다. 헬라어로 현재형은 반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는 것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 다. 왜 계속해서 인내해야 합니까? 참아야 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인내 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내하다 보면,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합니다.


“연단”으로 번역된 ‘도키멘’의 원형이 ‘도키메’인데, ‘인정받은 품질, 인정받은 인격’을 의미합니다. ‘시험한다’는 말을 ‘도키마조’라고 하지 않습니까? ‘도키메’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도키메’(즉, 연단)이란 어떤 (시험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나 시험을 통해서 인정받은 인격’을 말합 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인내할 때, 그런 “인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숙한 인격이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연마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붙잡고 끝까 지 인내할 때, 성도의 인격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인격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 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붙잡아서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 해서,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마 24:13절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게 나로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서는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서 “성숙된 신앙 인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여러분 안에서 인격화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삶”이 됩니다. 그러면, 소망의 주인되시는 우 리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소망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한번 연결해 보십시요. 환난이 우리를 닳아서 없어지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의지해서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인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인격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패턴을 기억하십시 요. 그래서 어떤 때에라도 소망을 기대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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