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욱 중요하다.(마 13:44-52)


신앙은 보이는 것이다.


농부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것이나 상인이 진주를 찾아다닌 것처럼, 구원의 과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복음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장소와 시간에 천국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어떤 사람은 “인생이 무엇이냐, 행복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를 찾아다니다가 천국 복음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천국 복음을 발견하고, 영접하고, 구원받는 과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샀다는 것입니다. 44절을 다시 보십시요.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도덕과 윤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 양심이 없구나! 그렇게 보물을 발견했으면 신고를 해야 하지 않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소유한 밭이 없습니다. 소작농입니다. 지금 그 밭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야 그 밭을 겨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엄청난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이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게 보여야 합니다. 믿음은 결국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물질 세계만 보고 살던 사람에게 영혼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이 땅만 보고 살던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천국과 지옥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해야 한다.


소유를 팔았다고 하니까 “재물을 다 교회에 갖다 바치라는 것이냐?”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기쁨으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모든 것을 팔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이고, “그것으로 보물을 사라”는 말씀은 “오직 진리의 말씀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르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천국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47절을 보십시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물”이 됩니다. 이 그물은 “각종 물고기 모는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각종 물고기”가 헬라어로는 ‘판토스 게누스’인데, ‘모든 종류’라는 뜻입니다. “물고기”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바다에 있는 모든 종류, 즉 물고기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생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의 구분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의 구분이 남았습니다.

“좋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이 ‘타 칼라’입니다. 여기서 또 “칼로스”가 나왔습니다. ‘목적에 합당한 것, 적합한 것’입니다. “나쁜 것”은 헬라어로 ‘타 사프라’인데, ‘무가치한 것들’이란 뜻입니다. 목적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물에 걸린 사람들, 천국 복음이라는 그물에 걸린 사람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타 칼라’, 즉 좋은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은 “최우선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아의 생각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자기를 주장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물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물 비유는 처음부터 좋은 것 나쁜 것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가르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물 안에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릇에 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서 슬퍼하며 이를 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무가치한 물고기가 가치있는 물고기로 바뀔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혹시, 이렇게 질문하려는 분이 계신가요?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도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예수님이 그런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신자가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다 바꾸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도, 가정도, 교회도, 민족도 다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붙잡으면 됩니다.

끝이 좋아야 한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라면, 자기를 부인하는 “옳은 행실”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예복, 즉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예수님의 세마포 옷을 입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 말씀의 옷, 십자가의 옷을 입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의 옷을 입고, 윤리의 옷을 입고, 비판과 정죄의 옷을 입고, 미움과 다툼의 옷을 입고, 자기 주장의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변해야 합니다. 그물에 갇힌 상태에서 “칼로스”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이 목적하시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끝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업적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업적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끝이 정말 중요합니다. 과정도 좋아야 하지만, 결국은 끝이 좋아야 합니다. 비행기가 잘 착륙해야 합니다. 김선도 감독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마지막에 잘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릴 때 넘어지면 안 됩니다. 마지막에 실족하면 안 됩니다. 끝에 가서, 좋았던 신앙, 존경받던 신자의 모습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우리 인생의 끝이 좋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정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끝이 좋은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말이 좋은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애교회도 결국은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결말이 좋은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답은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자기를 부인하십시요. 자기 주장을 멈추십시요. 오직 말씀에 이끌려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요. 그래서 끝에 가서, 주님 앞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