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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무게를 알면, 나머지는 별것 아니다.


영광의 무게를 알면, 나머지는 별것 아니다.(마 6:9-13)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그 아버지 되심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이것이 기도의 문을 여는 처음 관문인데,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영광을 깨달아 영적인 신비의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1.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처음 기도의 문을 열게 하시는 고백에 주목해야 한다. 헬라어로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라는 말은 “그 하늘들 안에 계신”이라는 뜻이다. 왜 예수님은 “그 하늘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성경은 창 1:1절부터 하늘에 대해서 복수를 사용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지”란 ‘하늘과 땅’이다. 그런데 하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핫 샤마임’이라고 했다. “그 하늘들”이라는 복수형 단어표시이다. 창 1:1절에 나왔던 “그 하늘들”이 주기도문에서 헬라어로 또 다시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은 창세기의 사고에 따라서 하늘이 3층천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하늘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느 하나의 하늘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들에 존재하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3층천의 하늘 어디에나 다 계시다는 뜻이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하나님은 일정한 공간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기가 어느 한 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 분이라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분인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 안에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덴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행 18:10절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해롭게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우리는 며칠 동안 하나님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2.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으로 역사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 안으로 달려 들어가게 하신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나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아빠,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도록 이끄신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거룩히 여기다’는 말이 헬라어로 ‘하기아스테토’ 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순결한, 깨끗한, 거룩한’ 이라는 뜻의 단어 ‘하기오스’에서 출발한다.(단순과거 수동명령형)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카도쉬’이다.


‘카도쉬’는 ‘거룩, 구별됨’과 같이 존재가 그 존재다울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 단에서 ‘카보드’, 곧 영광이라는 단어가 파생한다. 그러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가 아버지다운 존재가 되시도록 높여지시라’는 요청이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께서 아버지다워지시라”는 청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누구에 의해서 라는 ‘by~’ 이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을 ‘신적수동태’(passivum divinum)라고 하는데, 조금 어려운 표현이 나왔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기도처럼, 주체가 빠져 있는 수동태를 ‘신적 수동태’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종종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수동태를 사용할 때, 주체를 생략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들 중에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는 없다.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이미 높고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다만, 우리는 높고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은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을 받으시오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 원한다.”는 고백이다. 이 기도의 제목은 놀라운 신비를 간직한 내용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아버지,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답게(아버지의 존재답게, 아버지스럽게) 해 주세요”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이 존재하시기를 기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존재하시는 분인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빠를 아빠의 존재로 부를 때,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라고 느끼신다. 그러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로서의 영광스러운 상태, 내가 아빠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그 상태, 내게 가장 좋은 상태가 되어주세요”라는 요청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 되심으로 역사하신다. 성도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 믿음 안에서 담대하게 구해야 하는 것이다.


3. 끝으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우리는 “아빠”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허락하신다.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했던 고백을 기억해 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 14:8)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인가?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실 때 기뻐하신다고 했나? 히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권세를 허락해 주신다. 요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자녀의 권세, 영광의 무게는 엄청난 것이다. 그런 영광스러운 권세가 여러분에게 이미 허락되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한다. 특히 고난과 환난 중에 있다면, 더욱 그런 믿음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온전한 믿음이다.


바울은 고후 4:17절에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환난은 바울에게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을 가볍게 대했다. 바울의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변한 것이다. 환난은 인생의 무게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에 비하면 한참 가볍다.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무게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광의 무게를 알면, 높이 올랐다고 교만해지지 않는다. 낮은 곳에 처했다고 좌절하지 않는다. 많이 가졌다고 자랑하지 않고, 적게 가졌다고 비천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렇다면 기도를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겠나?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에게 자기를 올려 드리고, 자기의 구하는 바를 고백하고, 응답을 받아서 누려야 하지 않겠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요 16:23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여러분에게 이런 거룩하고 복된 기도의 신령한 세계가 열려지게 되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앙하는 기쁨이 날마다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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