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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가 내일의 “우리”가 된다.(출 3:13-18)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출애굽기에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는 “요셉”인데,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자리입니다. 왜 모세를 부르고 계시냐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구원하시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시려는 목적이 또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난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서,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모세를 부르는 자리가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려는 자리입니다. 그 중요한 자리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믿음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맺었던 관계, 신앙의 관계, 언약의 관계가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구 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세 사람 모두의 후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의 신앙만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세 사람 모두를 계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믿음을 계승한다는 것,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앙을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그 신앙을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우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고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의 후손도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는 이스마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면서도, 자기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의 후손이라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에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이삭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의 후손이면서 “야곱”의 후손이기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이 세 사람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나님이 있고, 이삭이 체험한 하나님이 있고, 야곱이 체험한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 사람이 체험한 것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체험, 즉 세 가지 체험이 다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나님


그러면, 아브라함이 체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75세였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여주시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보여준 것이 응답하는 삶,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언약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믿고 따르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라고 하실 때도 믿고 따릅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도 믿고 따릅니다. 마치가 어린 아이가 아버지 손을 붙잡고 따라다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서 삽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부르시니까 응답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니까 순종합니다. 그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응답하면서 시작됩니다. 믿음이란 “부르심과 응답”인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체험입니다.

이삭이 체험한 하나님


그것이 누구에게로 이어지냐면, “이삭”에게로 이어집니다. 갈 4:28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갈 4장에서, 이삭은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마엘은 “여종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면, 이삭은 “아들, 즉 자녀”를 보여 줍니다.

자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에게서 유업을 받아 누리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서 누립니다. 창 26장을 보면,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100배의 소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응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또 자녀 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까? 신앙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또 한편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창세기는 이삭을 통해서, “아들 된 자, 자녀 된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갑니다. 이삭의 스토리는 길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가 아버지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창 26장에서, 우물을 파는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가 파는 우물이 다 누가 팠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입니다.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파면서, 아버지가 갔던 길을 따라갑니다.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표상입니다. 닮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두 번째 체험이란 “받아 누리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이 신자의 축복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자녀 된 신자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닮아가는 과정이란 결국 자기를 내려놓는 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즉 야곱이 체험한 하나님이 그렇게 야곱을 이끄셨습니다.

야곱이 체험한 하나님


야곱은 정말 세속적인 인물입니다. 자기 생각과 뜻, 자기 지혜와 욕심을 앞세우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자기를 내려놓기 전에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속이고 속는 인생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러다가 라반에서 속아서 노예처럼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라반을 속이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뭔가를 이룬 것처럼 보이다가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렸다고 되찾고 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을 계속해서 내려놓게 하십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애착을 내려놓게 하시려고, 밧단아람으로 도망가게 하십니다. 자기의 정욕을 내려놓게 하려고 노예처럼 20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얍복 강에서는 직접 하나님이 씨름을 하면서, 그의 엉덩이뼈를 부러뜨립니다. 자기 다리를 믿고 일생을 살았는데, 이제 그 다리가 온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울었습니다. 호 12:4절을 보면, “야곱이 울면서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기를 다 내려놓지 못합니다. 야곱이 끝까지 베냐민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게 생명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설득 끝에,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 창 43:13절에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하면서,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냅니다. 그랬더니 또 다 잃어버렸던 인생의 기쁨을 회복합니다. 요셉과 베냐민을 다시 만나서 생명과 기쁨을 회복합니다. 가나안에서 기근으로 잃어버렸던 풍요를 다 회복하게 됩니다.

내려놓고 맡기면 역사를 체험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만들어진 “자기의 인격과 고집, 자기의 생각과 소유”를 움켜쥐고 놓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일생을 살면서 이룬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자기를 완전히 내려 놓지 못하고, 맡기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면 다 책임지고 인도하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왜 입니까?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는 자기의 진면목을 깨달아 아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구나. 나는 어리석은 존재였구나. 내가 잘 나서 된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은혜였구나. 인생이 내 힘으로 정말 안 되는 것이구나. 결국 나는 하나님 앞에 먼지와 같은 존재로구나” 이런 사실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 나려고는 야곱적인 자아, 야곱과 같은 욕망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야곱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만족은 “자기 부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를 붙잡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과 연합된 삶, 진짜 임마누엘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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