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삶을 온전하게 세워준다.(창 25:1-11)
아브라함의 삶이 누가 보기에도 완전하고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의 삶에는 실수와 질곡이 정말 많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셨나? 8절에 이런 표현이 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데, “나이가 높고”라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사베아’이다.
‘사베아’는 구약 성경에서 열 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모두 ‘충족한, 충만한’ 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만족한’ 이라고 의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단순하게 수치에 따라서 사용된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는 ‘나이에 꽉 차게 살았다, 나이에 만족하게 살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8절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만족할 만한 삶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삶이었기 때문에 ‘만족한 인생, 완전한 인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애가 만족할 만한 삶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셨다. 그의 인생에 함께 했던 세 명의 여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사베아’로 이끌어 가셨다.
1. 첫째, 사라를 통해서는 언약의 삶을 깨달아 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언약의 후손이 이어질 것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언약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말씀을 따라서, 약속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과 달랐다. 세상은 끊임없이 도전했고, 아브라함은 믿음이 꺾여질 만한 도전에 직면했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귀는 성도들의 믿음을 꺾으려고 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고 하셨던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환난”이라는 뜻의 단어 ‘들립시스’는 ‘트리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 ‘무엇인가를 막 문질러서 원형이 닳아 없어진 것’을 말한다.
여러분이 말씀 안에서 살기로 작정하면, 그렇게 환난이 자기를 닳아 없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런 환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이런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언약의 삶을 살면서 중요하게 깨달았던 진리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연단받을 때가 있다. 그런데 어느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도움이 되셨다는 것이다.
2. 둘째로, 하갈을 통해서 갈등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힘과 열심에 의해서 낳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이 자기의 힘과 열심으로 낳은 아들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정에 불화와 갈등이 들어왔다. 하갈이라는 여종이 자기의 주인이었던 사라를 무시하면서 가정의 질서와 평화가 깨져버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의 실수였다. 자기 안에 있는 자아를 의지하려고 하니까 그것이 결국은 불화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갈등과 부딪힐 때가 있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렇다. 신앙공동체는 하나가 되었을 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마귀는 교회가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꾸 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쪼개고, 갈등하게 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던 것을 기억해 보라. 행 2:1절에서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다같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하판테스 호모투마돈’이라는 단어로 쓰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냥 단순하게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여”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제자들의 마음이 하나 되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초대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갈등을 겪었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법을 하나님께 배웠다. 그래서 과감하게 갈등의 요인을 떠나보낸다. 자기로부터 떨어버렸다는 것이다. 부정과 갈등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을 떼어냈다. 그렇게 해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평화를 세웠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어야 한다. 과감하게 떨어버려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과 결별해야 한다. 마음에 찾아온 불황과 결별해야 한다. 그래서 갈등을 조정하고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3. 셋째, 그두라를 통해서 온유함이 완성된다.
아브라함은 세 번째로 아내를 맞이했다. 성경은 그두라를 아브라함의 세 번째 아내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두라는 어떤 인물일까? 그두라는 ‘향기’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의 마지막 생애를 함께 했던 온유함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노년을 보살피면서, 그의 자식을 6명 낳았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을 때,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주인이며 남편인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장자권을 계승하는 것에 순복하면서 조용히 따라갔다.
마 5:5절에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다. 온유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다. 온유함이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말이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말로 길들여진 상태를 말한다고 했다. 그것은 내가 머리가 되고, 내 생각이 머리가 되고, 내 자아가 머리가 되고 능력이 되면 도무지 될 수 없는 상태이다. 오로지 하나님이 머리가 되실 때에만, 그것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한 상태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머리가 되셔야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머리가 되지 않고, 내가 머리가 되어 살아가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내 이성과 자아과 생각이 머리가 되어 있으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면, 자기 자신의 어두움과 직면하게 된다. 말씀이 믿어질 수밖에 없고, 자기의 현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기의 죄된 모습을 보면, 말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것이 복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천국의 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온유함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심을 확실하게 인정하면, ‘사베아’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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