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주신 능력이 있다. 마음껏 활용하라.(마 17:22-27)


성전세와 관련한 이야기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24절을 보면,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반 세겔”이 헬라어로는 ‘디드라크마’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디스’는 ‘두 개’라는 뜻입니다. ‘드라크마’는 은으로 만든 유대인의 동전인데, 당시에 4드라크마를 한 세겔로 쳤습니다. 그러니까 두 드라크마를 “반 세겔”이라고 한 것입니다. 반 세겔을 내라고 한 것은 로마의 세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세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25세부터 50세까지 내야 했던 세금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전세를 내라고 하는 인물도 로마의 “세리”가 아닙니다. 성전을 위해서 율법에 부과된 돈을 거둬들이던 사람들입니다. 즉, 성전을 알고, 율법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알고 있지만, 율법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의 실재는 모르고 있습니다. 성전은 알고 있는데,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야 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아야 하는 주인입니다.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을 잠깐 베드로와 이야기하신 후에,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27절을 보면,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27절)라고 했습니다. 천국 복음에 실족할까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명령을 내리시는데, 여기에 중요한 메타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요. 27절입니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자기를 드리신 예수님


여러분, 여기에서 예수님이나 마태가 의도하는 바가 보이십니까? 우리가 지금 “자기 드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드림”이 보이십니까?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낚으라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지라”고 하셨는데, 헬라어 ‘프로톤’은 ‘최초로, 처음에’라는 뜻입니다. 행 11:26절을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란 말이 헬라어 ‘프로톤‘입니다. 최초로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첫째는 “물고기”이고, 둘째는 ‘프로톤’, 즉 “처음에”라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과 예수님의 “자기 드림”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그것은 “물고기”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헬라어로 “익투스”인데, 이 단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익투스”를 사용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은밀하게 예배할 때는 물고기 모양으로 암호를 삼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익투스”가 담고 있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헬라어 “익투스”의 앞 글자를 따서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리아스” 이렇게 다섯 단어의 앞글자를 따서 이으면 “익투스”, 즉 ‘물고기‘라는 뜻의 단어가 됩니다. 그러면 그 다섯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요? “예수스”는 ‘예수’입니다. “크리스토스”는 ‘그리스도’입니다. ‘데오스’는 ‘하나님’입니다. ‘휘오스’는 ‘아들’입니다. ‘소테리아스’는 ‘구세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리아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뜻이 됩니다. “익투스”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왜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자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시는 메타포입니다. “익투스”,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인 자기를 잡아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중요한 메타포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자기를 드려서 성전세를 내게 하셨습니다.


자기를 드려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면 성전세는 무엇입니까? 앞서 성전세는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으로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출 30장에서는 “생명의 속전”으로 “회막 봉사에 쓰라”(출 30:16)고 했습니다. 즉 성막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세는 성전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는 비용입니다. 예수님께 자기를 드려서 성전세를 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를 드려서 성전을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드려서, 즉 자기를 희생해서 여러분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다 어떤 존재입니까? 사망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자기를 드린 것입니다. 자기를 드려서 여러분을 세워주시고, 자기를 희생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엡 1:9절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엡 1:19절을 보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알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베푸신 지극히 크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지극히 크신 능력을 주시기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미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능력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능력, 봉사와 섬김의 능력, 말의 능력, 지식의 능력, 기도의 능력, 말씀의 능력” 이런 것을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사용하면 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기도의 능력을 사용하고 말씀의 능력을 사용하시라는 것입니다. 알고 사용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체험하려면, 주님처럼 자기를 드리면 됩니다. 주님이 자기를 드려서 교회와 성도를 세우신 것처럼, 여러분이 자기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이미 주신 능력이 있다. 마음껏 활용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이미 주신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열심히 쓰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라는 것입니까? 자기를 주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자기를 드려서 성도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여러분이 자기를 주님께 드리기만 하면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야 한다.


그렇게 자기를 드리려면,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3:16절에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기도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호 에소 안드로폰’은 ‘속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 죄를 미워하고 ‘생명의 법, 성령의 법’에 순종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처음에 하나님을 보고 시작합니다. 사람을 보고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서부터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사람을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이 싫어서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수많은 유혹들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향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결같이 주님께 자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실족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 자기를 드려서,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됩니다.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능력을 체험해서 하나님 신앙을 간증하는 복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결국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한 것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려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국 기도로 돌아옵니다.

여러분, 주님이 주신 능력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통로는 결국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일에 힘을 내십시요. 기도하면서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요. 그래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 나라의 존귀한 일꾼들로 쓰임받으십시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