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던 시절을 찾지 마라, 그 때의 하나님을 찾으라.(마 19:16-22)



예수님의 정신이 무엇이었나?


예수님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실 때, 사용된 헬라어가 ‘테레손’이란 단어입니다. ‘테레손’은 단순하게 어떤 행위로 지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본질적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지켜내는 것입니다. ‘테레손’은 본래 ‘굳게 붙잡으라, 지키라, 보살피라’는 뜻입니다. 요 17:11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보전하사”라는 말이 ‘테레손’을 번역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굳게 붙잡아서 완전하게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굳게 붙잡아서 보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테레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계명들을 ‘테레손’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계명들을 굳게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계명들은 굳게 붙잡아서, 그 계명의 정신과 가치가 훼손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법을 행위로 잘 지킨다고 해도, 법 정신이 훼손되게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호를 지키는데,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만 지킵니다. 그는 법을 지키는 것이지만, 법 정신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정신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젊은 부자가 그런 정신이 없습니다. 그는 형식은 왠만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정신까지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시절인지를 보십시요. 그는 지금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가 좋은 시절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좋은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요.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어떤 능력과 권세로 살게 하셨습니까?


주님께 의지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다.


오늘 설교 제목이 “좋던 시절을 찾지 마라, 그 때의 하나님을 찾으라”입니다. 사실, 이 표현의 근원은 토저 목사님이 말한 것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단, 좋았던 옛 시절을 원해서는 안 되고, 좋았던 시절의 하나님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시절을 너무 그리워하지 마십시요. 그 좋은 시절에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을 그리워하십시요. 좋은 시절을 찾지 말고, 좋은 시절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더욱 찾으십시요. 그래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추구하고 의지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계명들을 행위로 지켜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테레손’ 해 보아라. 그것을 마음으로 굳게 붙잡고, 율법의 정신까지 훼손하지 말아 보아라. 그것을 잘 보존하도록 지켜 보아라. 그러면 그 율법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를 붙잡고, 의지하는 신자가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대답할 때는 뭐라고 했습니까? 20절을 보면,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청년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했는데, 이때 사용한 헬라어가 ‘퓔락소’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행위로 지켜낸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않았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앗습니다.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까? 물론 자기 기준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은 제법 “나이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다 행위로 지켜냈다고 해도, 그것이 예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신까지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퓔락소’가 아니라 ‘테레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만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 훼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그것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굴복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주님께 더욱 엎드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단호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기서 더 나갑니다. 21절을 보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목을 읽을 때 어땠습니까? 막 10:21절을 보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정말 영혼을 사랑하신다면, “소유를 다 팔라”고 해서, 주님을 떠나게 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지금 너는 재물이 상당히 많지? 그런데 믿음은 적지 않니? 그러니까 지금은 좀 적당히 나눠줘라”고 해도 되지 않습니까? 지금은 적당히 나눠주고, 나중에 믿음이 좋아지면 다 주라고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그 사람은 근심하면서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 10:24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억하십니까? 24절에서 “표준원문”에는 있는데, 우리 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구절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이 UBS 헬라어 원문(세계성서공회연합회, United Bible Societies)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표준원문”을 번역한 킹제임스 버전으로 읽으면, 생략된 구절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투스 페포이도타스 에피 토이스 크레마신’인데, “Them that trust in riches”로 번역했다. 무슨 말입니까? “부를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부를 신뢰하는 사람들, 즉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단호하셨던 이유가 보이십니까? 오늘 말씀의 핵심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의존의 문제(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의지와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재물이나 무엇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 소유를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말씀은 진짜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의존의 문제입니다. 신뢰의 문제이고,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앞서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어린 아이처럼 부모에게 의존적인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 19:1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고 맡기라, 그러면 역사하신다.


그런데 이 부자 관원은 어린 아이와 같아지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의존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사실 주님이 소유를 팔라는 것은 자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자기를 맡겨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맡기지도 못하고,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맡기는 신앙입니다. 자기를 드리는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자기를 맡겨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을 돌이켜 보십시요. 주님께 무엇을 드렸습니까? 순종하는 마음이 아닙니까? 순종하는 마음을 드렸더니, 주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때 젊음을 드렸고, 재물을 드렸고, 시간을 드렸습니다.” 이런 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다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을 드렸기 때문에, 젊음을 주셔서 드리게 하신 것이고, 재물을 주셔서 드리게 하신 것이고, 시간을 주셔서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맡기고 드리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고, 주님께 자기를 드려보십시요. 핵심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쓰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불의의 무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드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절대 의존하는 믿음, 맡기는 신앙, 그래서 자기를 드리는 신앙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신앙인을 붙잡고 끝까지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