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주인인지 분명히 하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와 가시는데,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켰다”(1절)고 했습니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 번째로 지어진 성전입니다. 그런데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물론 성전의 본체나 뜰은 다 지어졌을 것이고, 외벽이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사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그래도, 지금 성전이 지어져가는 중인데, 거기에 대고 예수님이 몰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지금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는 말씀은 강조를 위한 “반어법”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다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까?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잘못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지 못하신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열심히 성전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성전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인입니다. 그런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인되지 못한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누가 성전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이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이 성전과 교회의 주인되셔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늘 기억하십시요.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인 여러분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네! 아멘입니다.) 여러분, 항상 그것을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계속 따라오십시요.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말씀의 의도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과 “세상 끝날”(즉, 종말)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몰락이 곧 세상의 몰락이다. 성전이 망하는 것이 곧 세상의 종말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주의 임재”와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자, 제가 앞서 한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도 미래의 일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하시는 시제가 어떻게 나가야 합니까? 미래 시제로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어떻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무엇을 볼 것이다”라는 식으로 나가야 합니다. 4절 이하부터 그렇게 말씀이 흘러가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런 패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이하를 보면, 시제가 미래형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몇 군데에서, 미래형 시제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4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속이지 않도록 잘 살피라”는 뜻입니다. 이때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앞으로 미래에 살피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해서 살피라는 것입니다. 왜 지금부터 살피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설명하겠습니다. 6절을 보면, “나라가 나라를 대적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나라가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합니다. 나라에서 군대가 소집되고 전쟁터로 출발했습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군대가 서로 맞붙어서 싸우기 전입니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시작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 심판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사탄이 미혹하지 못하도록, 거짓 선지자가 미혹하지 못하도록” 잘 살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뒤에 가서는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24:42절을 보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지금부터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공이 아니라 심판의 무대이다.
여러분, 이 세상이 성공의 무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성공과 출세의 무대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신앙도 포기하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히 말씀을 보고, 적당히 예배하면서, 성공과 출세에는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뒤집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성공의 무대라면, 성경은 자기를 계발하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성공과 출세를 목적으로 삼으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계발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성공과 출세를 목적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고,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성공의 무대가 아니라, 심판의 무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심판의 무대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하나님을 배반했던 모든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요한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 16:24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휘포메이나스’는 ‘~아래에 계속해서 남아있는’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이 무엇 아래에 계속해서 남아 있으라는 것입니까? “예수 이름”입니다. 여러분이 주인 삼으신 예수님 아래에 계속해서 남아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좋은 비전을 가지라.
오늘 말씀 제목이 “좋은 환경이란 없다, 좋은 비전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대인 세상이 어떻게 좋은 환경이겠습니까? 특히 성도에게는 더 그렇지 않습니까? 9절을 보십시요.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즉,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 좋은 환경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도는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와 좀 다르지만, 성도는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했던 것처럼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좋은 환경을 가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요. 좋은 비전을 가지려고 애를 쓰십시요.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세상이 가르치는 비전과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비전을 히브리어로 ‘카존’이라고 합니다. ‘묵시, 계시’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비전이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이 바라보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비전을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관점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셔서, 비전을 이루는 사람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열등감”이 있습니다. ‘나는 환경이 좋지 않아서, 많이 배우지 못했어. 그렇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어, 결혼할 수 없어, 행복할 수 없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과거에 붙잡혀서, 자기의 미래까지 망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관점과 생각이 달라집니다. ‘나는 환경이 나빠서 많이 배우지 못했어. 그러니까 더 열심히 믿자. 더 열심히 주님을 의지하자. 더 열심히 주님을 따라가자. 더 열심히 순종하자. 더 열심히 노력하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요셉은 노예였고, 다윗은 도망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했습니다. 더 열심히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다윗은 30세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이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날마다 가까이 하십시요.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십시요.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이 주인되시게 하고,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십시요. 그것을 위해서 끝까지 견디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휘포메이나스 예수’, 예수님 아래에 계속 남아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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