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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능력을 알라, 그래야 기도하게 된다.(마 8:5-13)


믿음은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기라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잠 16:3절 말씀을 기억해 보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다. 성도가 마땅히 따라야할 영적인 도리가 여기에 있다. 아모스서에서 선지자 아모스가 세 번째로 외쳤던 설교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 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암 5:4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와 은혜가 있다.

자기의 자아를 붙잡으면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찰스 스펄전은 “모든 적그리스도 가운데서도 자아는 가장 이기기 어려운 상대”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했다. 교만한 자아가 쇠하는 것을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가 흥하시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자아가 쇠해야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다. 자아가 쇠지 않고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왕권을 가지고 주인되실 수가 없다. 앤드류 머레이가 말했듯이,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으로부터 출발하면 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능력이 살아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백부장의 믿음이 칭찬받은 이유가 있다.


오늘 본문에는 백부장이 나온다. 그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눅 7:5절에서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설명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돈을 드려서 회당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 또한 자기의 하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하인”은 ‘둘로스’가 아니라고 했다. 본문에서 “하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이스’이다. ‘파이스’는 어린 아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파이스’는 어린 심부름꾼을 말한다. 요 4:51절의 경우에는 ‘파이스’라는 단어가 ‘상속받는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백부장의 하인이 어린 심부름꾼이든 혹은 상속을 받을 아들이든, 중풍에 걸린 사람은 어리거나 젊은 사람이다.

그 젊은 사람, 혹은 어린 사람이 중풍에 걸려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와서 그 사람을 고쳐달라고 간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7절,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평서문이 아니라, 의문문으로 번역하는 주석학자들도 있다. 그럴 경우에, 이 말씀은 “내가 가서 고쳐주어야 하냐?”라는 의미가 된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데, 이방인의 집으로 꼭 가야 하겠느냐는 완곡한 거절의 의미이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백부장의 반응이 놀라운 고백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백부장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놀라운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이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이다. 이것은 직역하면 “나는 가치가 없습니다.”(I am not worthy)라는 뜻이다.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주님이 저의 집에 들어오실 만큼 가치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가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한 것이다. 자기의 자아를 완전히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서 고백을 이어갔다. “이방인인 제가 어떻게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하겠습니까? 주님은 말씀만으로도 낫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유대들도 아직까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방인의 믿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보지도 않고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천국을 침노한다.


구원이 먼저 임한 곳이 어디냐면 선택받은 이스라엘이었다. 이방인은 선택받지 못한 지옥의 땔감들이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방향을 누가 틀었는지 보셔야 한다. 믿음으로 천국을 침노한 이방인들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그 거부한 결과로 구원이 이방으로 향하게 되었다. 즉 선택을 받았다고 해도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믿음이 중요하다.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예수님께 그냥 말씀만 하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9절에서,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는 주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믿었다. 확실하게 알고 믿으니까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에 주목하셔야 한다. 오늘 설교 제목이 “주님의 능력을 알라, 그래야 기도하게 된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게 된다고 했나? 주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기도한다고 했다. 위대하신 주님의 능력을 알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 주제를 우리가 몇 번 다루었는데, 여전히 기도에 진전을 보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신자가 기도에 있어서 진전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에 진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요 11:40)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믿지 못하는 이유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정말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체험한다.


현대인들에게는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졌다. 과학이 할 수 있고, 재물이 할 수 있고,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체험하지 못하니까 알지 못한다.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 확실하게 기도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까 기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저 마음의 위안 정도로만 삼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기도는 능력이다.

엘리야가 인내하면서 비를 달라고 기도한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몰랐다면 그는 그렇게 인내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마른 하늘을 보면서 계속해서 기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구원의 은총을 입었던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를 생각해 보라! 그도 다윗의 후손이 되시는 메시야의 능력을 알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알고 믿었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로 저주받은 운명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능력을 알면 구하게 되어 있다. 기도하고 구하고 찾게 되어 있다. 현대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분의 능력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에 응답을 받았던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의 사랑과 자비하심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인 것을 믿고 알았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보여지고, 주님의 말씀과 능력이 믿어지게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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