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의 모습
오늘은 청지기 주일입니다. 그래서 청지기 정신과 관련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다룬 적이 있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제목을 정하라면,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쯤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청지기가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인데,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는 ‘집 안’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규범, 관리’라는 뜻의 ‘노모스’가 합쳐진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 즉 청지기’라는 뜻이 됩니다.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했는데, 여기서 “맡은 자”가 ‘오이코노모스’입니다. 그러니까 청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 주인에게 신실한 관계를 보여주는 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에 가서 칭찬을 받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를 책망합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삶이 고단해지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로운 모습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주인에게 피해가 될 만한 생각을 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빚을 감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증서를 위조해서 빚을 감해 주면, 자기가 쫓겨난 뒤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보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서를 위조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주인이 청지기가 문서를 위조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칭찬합니다. 8절을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불의한 청지기보다 더 이상한 것이 그를 칭찬하는 주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이상합니다. 말씀의 진의가 무엇이지 깨달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고정관념을 깨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상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고정관념에 대한 생각이 깨져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주인이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겠나?”라는 고정관념입니다. 그러면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늘리는 일에 관심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이 깨져야 본문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보인다.
우리는 1절에서,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는 구절 때문에 함정에 빠집니다. 주인이 재물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청지기를 책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주인은 청지기가 재산을 깎아 먹었는데도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재물이 줄어서 청지기를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의도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 번 드렸으니까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1절에서, “낭비한다”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스코르피조’인데, ‘의무를 게을리 하다, 자금을 횡령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다른 목적에 사용했습니다. 주인의 소유가 사용되어야 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비유하고 있는 청지기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비유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불의한 청지기와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과 시간과 재물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의 소유권자가 하나님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건강도 재물도 모두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면 그 소유가 누구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까? 무엇을 목적으로 쓰여야 합니까? 주인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맞다면,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쓰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마치 자기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주인의 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횡령합니다. 의무를 게을리 합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욕망과 쾌락과 행복을 위해서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결국 청지기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두 종류의 길밖에는 없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되느냐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느냐?” 이 두 종류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처음에 이 청지기는 불의한 청지기였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놓은 것을 가지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낭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에게 종말을 고한 뒤에 달라졌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하는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반드시 종말의 때가 있다”는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를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결산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그런 자기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에게 언젠가는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가 그런 종말의 때를 준비했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마지막 때를 준비하지 않고 있는데, 불의한 청지기였던 사람은 종말의 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책망한 후에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4절에서,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종말을 인식한 순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주인이 맡겨놓은 것을 가지고, 자기 목적에만 사용했습니다. 재물이 흘러가게 하는데, 그것이 낭비입니다. 시간이 흘러가게 하는데, 그것이 낭비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야, 내 인생, 내 시간이 살아가야 하는 올바른 방향을 알겠구나”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인생의 방향성을 제대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살아가라.
예수님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불의의 재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동안 내가 ‘나를 위해서 쓰던 시간, 나를 위해서 사용하던 재물, 나를 위해서 살아가던 생명’이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인이 맡겨 놓았는데, 자기를 위해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모든 것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쓰던 재물과 생명과 시간으로 친구를 사귀는 일에 쓰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의 목적,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삶이라는 것이 주어졌는데, 누구도 예외없이 마지막 때에 분명히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지위, 생명, 재능,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입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결산받을 뿐입니다. 그때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나쁜 청지기(악한 종)이라고 책망받을 것입니다. 내가 주어가 되고 주인이 되어서 행한 일이라면 주님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목적에 따라서, 성령님께 이끌려서 살았다면, 주님께 기쁨이고 여러분에게 칭찬일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올해,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에 의해서(성령님에 의해서), 주님의 목적에 따라가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올해 교회 표어가 “순종으로 ‘말씀, 기도, 선교’를 세우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순종으로”라는 말은 내가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끌림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성령님에 의해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가겠다는 말입니다. “말씀, 기도, 선교”를 내가 세우고,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그렇게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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