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는아프다.
오늘 설교 제목이 “죽은 나무는 가지를 치지 않는다, 산 나무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만일 나무에게 감정이 있다면, 가지치기를 당할 때 아플까 아프지 않을까? 당연히 아플 것이다. 그런데 죽은 나무를 가지치기 하는 사람이 있나? 없다. 죽은 나무는 가지치기 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나무가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가지를 치는 것이다.
여러분도 가지치기를 당할 때가 있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슬퍼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열매를 기대하시지 않으면 가지를 치지 않으신다.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하시는 것이다. 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고 믿고 인내해야 한다. 고난이나 시련이나 역경 중에라도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믿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믿음이란 고난을 뚫고 나올 때, 인내를 뚫고 나올 때, 더욱 단단해진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온전한 믿음이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던 말씀이 보여지는 것이 믿음이다. 보이지 않던 약속이 보여지고, 보이지 않던 은혜가 보여지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두운 환경 속에서라도 빛을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을 세워야 한다. 비바람 몰아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폭풍 속에서 어디에 시선을 둘 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느냐가 중요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 더욱 그렇다. 인간은 자기의 정체성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의 무대가 무엇인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처럼, 결혼식장에 축하객으로 갔는데 자기가 신랑이고 신부인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결혼식장에서 마치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행동해도 안 된다. 반대로 장례식장에 가서 결혼식장에 온 것처럼 웃고 떠들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무대가 어디인지, 자기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Self- Identity에서 Dignity가 나오게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거기에서 그에 맞는 품위와 인격이 나오는 것이다.
세상은 심판의 무대이다.
그러면 이 세상이란 어떤 자리, 어떤 무대일까? 우리가 “구원”이란 말을 많이 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심판이 있다는 뜻이다. 심판을 통과해서 멸망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심판을 통과해서 구원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란 심판의 무대라는 것이다. 세상이 심판의 무대이기 때문에 심판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성공의 무대라면 성공을 이루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행복의 무대라면 행복을 이루어야 한다. 부귀영화를 위한 무대라면 그것을 궁극적으로 이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무대가 아니다. 세상은 심판의 무대이다. 거기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심판의 무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이냐가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내 안에는 나를 주인으로 삼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내가 하나님이고 왕인 부분들이 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 내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나’라고 하는 자아를 더욱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다. 그 임금을 세상이라는 심판의 무대 위에 올려놓고 심판받아 죽어지게 해야 구원으로 가는 은혜의 통로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오늘 설교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앞서는 여러분의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당한다고 말씀드렸다.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러분의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아가 고난과 역경으로 잘려나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살아있는 자아가 가지치기를 당해서 죽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을 알아야 한다.
성도는 심판의 무대라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무리들 속에서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들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것이 마 8:1-17절까지 이어진다.
처음 나오는 사람이 나병환자이다. 구약에서 나병은 죄로부터 출발한다. 그냥 죄 자체이다. 구약 성서의 정결법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보면, 온 몸이 죄로 물든 사람이다. 그렇게 죄로 물들어서 사망으로 가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나병환자이다.
두 번째로 나오는 사람이 백부장의 하인이다. 백부장이 말하는 “하인”이란 헬라어로 ‘둘로스’가 아니라 ‘파이스’이다. ‘둘로스’는 ‘종’이란 뜻이고, ‘파이스’는 ‘소년, 혹은 소녀’란 뜻이다. 그러니까 백부장의 하인은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중풍병에 걸렸다고 했다. 젊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뇌출혈과 같은 것으로 마비증세를 보인 것이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질병에 붙잡혀 있는 인간, 이성이 마비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오는 사람이 베드로의 장모이다. 그녀는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눅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열병을 고치실 때 “꾸짖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눅 4:39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라고 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페티메센’은 주로 귀신을 내쫓을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열병”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보았다. 그러니까 더러운 귀신을 향해서 “떠나가라”고 꾸짖고 쫓아내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현존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인간은 죄와 사망에 붙잡혀 있다. 질병에도 붙잡혀서 이성이 마비된 상태이다. 그래서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권세에 붙잡혀 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생각을 넣으시지만, 사단도 인간 안에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을 끊임없이 넣으려고 한다. 그래서 벧전 5: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얽매인 인생이 심판의 무대를 사는 인간의 현존이다. 여기서 자기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의 한계이다. 죄와 사망과 질병과 귀신에 포로가 되어서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상태이다. 예수님이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으로 오셨다.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려는 이미지이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 때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면서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 8:2) 이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린다. 자기를 굴복하고 예수님께 간구한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면”이란 예수님이 하려고만 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괴롭히는 문제의 주권이 예수님에게 있다고 믿었다. 온 몸이 죄로 덮여져 있는 부정한 사람이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죄에 대한 주권과 다스림이 예수님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믿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지만, 은혜로는 해결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다.
그러자 주님의 은혜가 나병환자에게 임했다.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신다. 말씀을 보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다고 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주님이 원하시면 변화를 받을 수 있다. 주님이 하려고 하시면 기적이 체험되고, 능력이 체험될 수 있다. 주님이 하려고 하시면 어떤 문제나 질병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부정한 것이 떠나가게 하셨다. 이 사람은 악하고 더러운 질병에 걸려서 사망으로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다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사망의 권세, 죄의 권세,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 질병과 마귀 권세에 붙잡혀 있었다. 누구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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