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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씨앗은 땅에 삼키고, 산 씨앗은 땅을 삼킨다.(행 6:1-7)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우선적인 것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믿음에 혼란이 생기고 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니까 믿음도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믿음을 유지해야 할까? 그리고 성도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오늘은 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1.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

본문은 초대 교회의 장로가 세워지는 중요한 대목이다. 오늘 말씀을 보자.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인가? 과부들이 음식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서이다. 그런데 또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제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다.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아졌는데, 감사하기보다 원망이 늘어났던 것이다. 사람이 적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사람이 많아지니까 문제가 생겼다는 말씀이다. 그것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늘었는데, 그리스도의 제자가 많아졌는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가 있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것 때문에 불편할 수가 있다. 무언가 인생이 풍요로워지면, 그로 인해 감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무언가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려지면, 감사해야 하는데 또 다른 문제로 인해 불만족할 때가 있다.

성도란 신앙생활하면서 구원받았음에 감사하고, 받은 은혜로 인해 감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구원의 감격이 희미해지고,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불편하면, 관계가 불편해지고, 인생이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잘 넘어서야 한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욱 부흥했다.

이 과정에서 리더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는가? 그들은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는가? 그들이 기본기에 충실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사도들은 기본기를 다시 세웠다. 그들은 “말씀과 기도”를 회복했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서 원망이 생겨났으니, 구제비를 평준화하려고 애쓰면 된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보다 앞서 특별한 일을 했다. 열두 사도들이 모든 제자를 불러서 선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행 6:2) 그리고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성도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을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사도들은 자기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행 6:4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여기서 사도들은 중요한 선택을 한다. 일곱 명의 집사를 선택해서 구제의 책임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은 보다 핵심적인 것에 집중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말씀과 기도’를 세우는 것에 힘을 다했다. 그것이 기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고,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에 대해서, 가정의 행복과 질병과의 싸움을 위해서, 모든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기도가 모든 결정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2. 원칙과 원칙이 충돌할 때는 우선순위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사도들은 단순한 보편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평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서 원망이 생겨났으니까,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좀더 신경을 쓰자고 했을지 모른다. 12명의 사도들이 더 열심히 구제하고, 더 열심히 섬기고, 더 열심히 봉사하자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우선순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사라지면 혼란은 더욱 깊어진다. 상황이 혼란스럽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한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흐름을 타는 것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일곱 명의 집사를 새로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구제의 사명을 감당하게 했다. 생각해 보시라. 12명이 하던 일을 7명이 한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상식적인 계산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나누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사도들은 말씀도 전하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섬기는 일도 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나눠서 하다보니까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선순위를 나누고, 자기가 맡은 책임에 집중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교회가 되더라는 것이다.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선순위를 가려야 한다. 특히 원칙과 원칙이 충돌할 때가 있다. 법과 법이 충돌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순위를 가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원칙이 상위에 있는지, 어떤 법이 상위에 있는지 가려야 한다. 그렇게 우선순위에 따라야 혼란이 정리가 되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우선순위란 무엇일까? 당연한 말씀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짜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요즘은 원칙과 원칙이 충돌을 일으키는 시대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순위를 따라야 한다.

사람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고 하셨지,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도에게는 이 예배를 빼고 아무 것도 출발할 수가 없다. 이 예배란 단순한 친교모임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회개해야 한다. 예배란 하나님께 드림이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를 올려 드리는 것이다.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생명이 출발하는 첫 시간이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이것이 예배에 담겨져서 하나님께 올려질 때, 우리는 진실한 양식과 건강한 호흡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3. 혼란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 사명을 생각해야 한다.

죽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 씨앗은 땅에 삼켜지게 된다. 쉽게 말해서 땅에 떨어져서 그냥 썩어질 뿐이다. 흙 속에 파묻혀서 흙이 되어 버린다. 반면에 산 씨앗이 딸에 떨어지면, 그 씨앗은 땅을 삼켜버린다. 땅에 흩어져 있는 온갖 양분을 흡수하면서 싹을 틔운다. 흙에 삼켜지지 않고, 흙을 뚫고 나온다. 싹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씨앗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이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은 차원이 다르다. 죽은 믿음은 세상에 삼켜지고, 산 믿음은 세상을 삼킨다. 죽은 믿음은 세상의 논리에 묻혀서 썩어지지만, 산 믿음은 세상의 더러운 논리를 뚫고 나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 사명이 담겨져 있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이 생각했던 관심사가 무엇이겠나? 한 마디로 “사명”이다. 그들은 “말씀”을 흘러가게 해야 하는 사명 앞에 있었다. 복음을 흘러가게 해야 하는 사명 앞에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싸우고, 죽고, 죽이는 영화나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과정이 편안한 것, 결말이 시원한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간혹 그런 영화를 보면, 임무를 맡은 군인들의 불굴의 의지를 느낄 때가 있다. 동료들이 한 사람씩 쓰러져 나가기 시작하고, 환난과 역경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나간다.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다. 이유가 무엇이겠나? 사명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인가? 여전히 혼란스러움의 잔재가 남아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기억하시라. 세상에서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도,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러분의 사명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인생사를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이고,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능력과 힘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을 믿고 승리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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