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16_지성소, 그 거룩한 곳을 향하고 있는가?(레 16:1-5)

3월 18 업데이트됨


오늘 우리는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네 번째 말씀인 “안식일”과 관련해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안식일에 관한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이다. 출 20:8절 말씀이 우리말 성경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는 “지키라”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고 했다. 원문은 그냥 “거룩하게 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 거룩을 위해서, 우리의 예배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세상은 성도의 믿음을 퇴색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성도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마음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거짓과 불의로부터 자기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 오늘은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시라. “거룩”,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하자.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묵상하고, 그런 예배가 되도록 사모하시기 바란다.


1. 아무리 생각해도 “거룩”은 은혜의 단어이다.


“거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창 31장에서 야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드린 말씀이다. 거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되다, 분리되다’란 뜻이다. 그런데 ‘카도쉬’는 ‘그냥 구별되다, 분리되다’란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다운 상태로 구별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창조의 목적인 상태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거룩’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나? 웨스트 민스터 신앙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고백이,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다. A.W. 토저는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은 예배를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된 이유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가진 이유는 이것이니, 곧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거룩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그래서 설교자들마다 “예배에 생명을 걸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배에 생명을 건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


1662년은 청교도주의자들이 영국 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축출을 당했던 때이다. 1662년 영국 국교회는 오로지 “성공회 기도서”만을 모든 교인들에게 의무적으로 강요했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 39개의 신조를 신앙고백으로 삼도록 했다. 청교도주의자들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청교도주의자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축출당하고 비국교도로 박해의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교회에서 쫓겨났고, 교회로부터 아무런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집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설교했다. 그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논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은 계속해서 설교했다는 것이다.


1665년 영국에 ‘페스트’라고도 하는 엄청난 전염병인 “흑사병”이 돌고 화재가 발생했다. 이미 300년 전에 있었던 엄청난 고통의 역사를 알았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영국 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피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설교했고, 회중들을 계속해서 불러 모았다.


그들이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을까? 그 중에는 ‘리차드 벡스터’나 ‘윌리엄 베이츠’와 같은 탁월한 설교가가 있었다. ‘존 오웬’이라는 옥스포드의 학장을 지낸 탁월한 신학자도 있었다. ‘조셉 얼라인’이라는 탁월한 영성가이며 목회자도 있었다. 그런 청교도주의자들, 비국교도로 축출당했던 청교도주의자들이 법령을 어기고 계속해서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잡혀들어갔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도 똑같은 이유로 베드퍼드에 있는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존 번연’은 바로 그곳에서 자기 인생 최고의 역작인 “천로역정”을 집필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고난도 있었지만, 은혜도 충분하게 받았다. 청교도주의는 오늘날까지 위대한 영적인 유산을 남겼다. “거룩”, 그것은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이다. 그리고 신자가 “거룩”,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신다.


2. 왜 지성소의 의미가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오늘 읽은 레위기 말씀은 이스라엘의 대속죄일 규례에 나오는 말씀이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의 종교력으로는 7월 10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유대의 종교력으로 7월이면, 민간력으로는 1월(태양력으로는 9,10월)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날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다.


그런데 이 지성소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빛이 없는 암흑의 장소라는 것이다. 제사장이 성전 뜰에 들어서면 거기에는 태양이 뜰을 비춘다. 거기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불을 켜서 비추이게 했다. 그런데 지성소 휘장을 넘어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빛이 없는 암흑이다. 왜인가? “빛이신 하나님, 빛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불꽃으로 임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순금으로 되어 있는 정육면체(정방형)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순금은 순결을 상징하며, 정육면체의 방이라는 것은 ‘정확하고 무오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지성소는 순결한 장소이다. 세 번째 특징이 중요한데, 그곳은 침묵의 장소였다고 했다. 이 침묵의 장소인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만나면 살고,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면 죽는다.


지성소는 빛이 없는 암흑이며, 침묵의 장소이다. 그렇게 암흑과 침묵의 장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은 기대와 두려움을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간다. 성경은 예수님의 무덤과 관련한 짧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 예수님의 무덤을 지성소와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증거한다. 그래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무덤이 지성소가 가진 특징과 동일하다.


성경은 예수님의 무덤을 동굴 무덤이라고 했다. 동굴 무덤, 빛이 있는 곳인가 어둠의 장소인가? 어둠의 장소이다. 지성소의 두 번째 특징이 순결한 장소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무덤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눅 23:53절,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아직 한 번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 곧 순결한 장소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특징이 남아 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실 때, 소리가 있었나 없었나? 질문이 어렵다면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보자. 살아서 들어가셨나 죽어서 들어가셨나? 완전한 죽음 뒤에 무덤에 들어가셨다. 다시 말해 무덤에 들어가실 때, 아무 소리도 내실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성소가 침묵의 장소라는 것은 대제사장이 죽어서 들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간다. 예수님도 세마포 옷을 입으셨다. 이처럼 암흑의 장소, 순결과 침묵의 장소로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간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면 살고, 보지 못하면 죽는다. 이것이 지성소의 중요한 의미이다.


3. 성도는 지성소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의미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지성소 깊은 곳으로 나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성도가 하나님 임재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예배를 드렸으나 그 영혼과 마음이 죽어버린다. 부정과 불평에게 자신이 사로잡혔음을 깨닫게 된다. 두려움과 원망하는 마음에 자신이 붙잡혔음을 알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사는 것이다. 영혼이 살아나고 마음과 영혼이 기쁨과 감사로,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대제사장은 오직 침묵 속에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선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죽는다. 두렵고 떨릴만한 일이다. 나이가 많은 제사장이라고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까, 이번에는 죽어도 괜찮다’라고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왜라고 했나? 지성소에 들어가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이스라엘이 다 죽는다. 하나님께 속죄할 사람이 없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이스라엘이 다 죽는다. 그러니까 그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 무조건 하나님 임재를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의 심정은 비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가는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는 소리를 낼 수 없다. 자신을 다 죽이고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실 때 죽어서 들어가셨다. 대제사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정욕을 다 죽이고 지성소로 들어간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죽이고 들어간다.


그리고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살려가지고 들어간다. 그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하나님 임재하여 주옵소서”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제게 임하시옵소서. 하나님 이곳에 임하여 주옵소서”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침묵과 암흑 뿐인 곳에서 제사장의 초점은 하나이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 체험 뿐이다. 거기에 “빛이 있으라”, 하나님 임재의 불꽃, 쉐키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우리가 지성소 깊은 곳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세속적인 더러움 뿐 아니라 우리의 사명까지도 모두 벗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면서 침묵과 암흑 속으로 나아가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 임재의 영광스러운 불꽃, 떨기나무 불꽃과 같은 타지 않는 불꽃을 보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보면 사는 것이다. 영혼이 살아나고 인생이 살아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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