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에 빠지지 말고, 감사에 붙잡히라(마 9:1-8)


오해와 착각에서 벗어나라.


신앙생활에서 오해하고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구약에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대표적이다. 왜 에덴 동산의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으셨다고 했나? 이 나무만 없었어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에덴에서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나무를 심어두신 것에 불만을 제기한다. “그 나무만 없었어도 되지 않나? 하나님께서 그 나무만 심어두지 않았어도 인간은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자기가 잘못을 해놓고도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자기가 실수하고, 자기가 범죄하고,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고, 하나님을 불신앙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성경을 잘못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나? “누가 주인이냐”에 대한 선언이라고 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무엇이든지 먹고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동산을 다스려야 했다. 창 2: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했다. “경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섬기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섬기고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이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아담은 청지기이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것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 했다. 아담이 주인되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동산 중앙의 나무가 지표가 되었다. 그것이 그의 영적인 표적이 되는 것이다. 동산 중앙의 나무를 볼 때마다 “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청지기이다.”라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말씀이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영적인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


말씀이란 인간 지성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 사고”와는 배치될 수 있다. 신약에서는 “동정녀 탄생”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동정녀 탄생이라고 했나? 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했다고 했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이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낳게 하신 것이다. 이게 동정녀 탄생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이렇게 말씀이 지시하는 영적인 본질을 꿰뚫지 않으면 오해와 착각에 빠진다. 그러면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실종되어 버린다. 질병을 고치는 이야기도 잘 생각해 보시라. 백부장의 하인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고침을 받았다. 마 15장에서는 가나안 여인의 딸이 귀신들린 병에서 고침을 받는다. 마 17장에서는 귀신들린 아이가 고침을 받는다. 이 말씀들을 잘 생각해 보시라. 믿음을 고백하고 드러낸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백부장이고, 회당장이고, 가나안 여인이고, 무명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였나? 백부장의 하인이고, 회당장의 딸이고, 가나안 여인의 딸이고, 어느 이름없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 다르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병이 낫고,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주인공이 아니다. 회당장의 딸이 주인공이 아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과 아버지의 아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백부장이고, 회당장이고, 가나안 여인이고, 아버지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보셔야 한다.

중풍병에 걸렸던 백부장의 하인이 건강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백부장이 씨름하던 인생의 고통이 해결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 핵심이 아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붙잡고 씨름하던 인생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나안 여인도 마찬가지고, 무명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고통의 문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나타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이 목적이다. 여러분, 이것을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붙잡고 씨름하는 인생의 고통이 무엇인가? 여러분을 고뇌하고 하고 번민에 빠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신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고통과 번민과 실망과 좌절에서라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과 능력에만 관심을 두면 안 된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때 마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 9:2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이 어디까지 도달해 있다고 보신 것인가? “죄 사함의 믿음”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인 것을 믿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의 권세”를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서기관들은 어땠나?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여겼다. 헬라어 ‘블라스페메이’는 ‘신을 모독했다’는 뜻이다. 서기관들이 착각에 빠져 있다. 자기들의 신앙전통과 학문,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이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러니까 기적을 보고도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착각에 빠지지 말고, 감사에 붙잡히라”고 했다. 서기관들처럼 과학적 지식과 경험적 상식에 붙잡혀 있다면 영적인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세속적인 인간의 생각이 서기관들과 똑같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악한 생각”이다. 4절을 보시라.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했다. 악한 생각에서 나오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예수님은 기적과 능력의 주인이시다. 그런데 기적과 능력의 목적이 무엇이냐? 거듭 말씀드리지만,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고통 중에서 최고의 고통은 죄와 사망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제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이 관심하는 것은 병이 낫는 것이다. 인간은 기적의 권능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기적의 권능에 대해서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고 하셨다. 여기서 “권능”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은 ‘자유’란 뜻도 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유롭게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서기관들은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인생의 고통에서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무엇보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것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인생인 것을 믿어야 한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인생의 문제는 주님께 다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자기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요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시기 바란다. 그러면 날마다 감사가 고백되고, 감사가 계속되는 영적인 권세자로 살게 되실 것이다.